浮世川-西村亜希子
作詞 高橋直人 作曲 花笠薫
一
あなたと 私の間には
越すに越されぬ 川がある
いくら好きでも 愛していても
あゝ... 渡る 橋がない
風が身を切る 浮世川...
二
哀しい心に 音もなく
寄せる冷たい 細波(さざれなみ)
涙ふくたび やせてく影の
あゝ...すがる 胸はない
ゆれて流れる 浮世川...
三
添えない仲なら 宿命なら
せめて一夜の なさけ舟
髪の芯まで 焦がれていても
あゝ...思い かなわない
夢で逢いたい 浮世川…
日本の歴史 平安遷都
桓武天皇(かんむてんのう)은 784年에 寺院과 貴族의 干涉을 避해 ‘平城京(へいじょうきょう)’를 버리고 山背国(山城国=やましろのくに)의 長岡(ながおか)로 首都를 옮기지만 災害와 政治的 混亂으로 因해 10年 만인 794年에 이곳을 버리고 只今의 京都인 ‘平安’으로 遷都를 하게 됩니다. 以後 平安은 只今의 東京인 江戶로 遷都하기까지 約 1100年 동안 日本의 首都로서 그 機能을 다합니다.
平安遷都の理由
原來 首都는 784年에 桓武天皇이 自身을 牽制 하던 貴族들과 寺院들의 勢力으로부터 벗어날 儀刀로 平城京에서 奈良 北端에 位置한 長岡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首都 移轉과 建設이 함께 이루어지던 途中 責任者였던 藤原種継(ふじわらのたねつぐ)가 暗殺되고 그 背後로 早良天皇(さわらてんのう)이 指目되어 流配 中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天皇의 周邊에서 不幸이 끊이지 않게 된 것은 이 事件 以後. 夫人의 죽음을 始作으로 生母와 皇后까지 世上을 떠나게 된 것이지요. 더욱이 疫病과 饑饉 水害 等 나라 全體가 災殃에 휩싸이면서 이 모든 것이 早良天皇의 怨靈에 依한 것으로 믿게 된 桓武天皇은 災殃들로부터 벗어 나기 爲해 794年에 지금의 京都로 首都를 옮기고 平安京(へいあんきょう)로 命名하게 됩니다.
平安京の規模
平安京는 緩慢한 山들에 둘러싸인 盆地에 中國 唐나라의 首都인 長安과 平安京를 模倣하여 東西 約 4.6km 南北 約 5.3km의 規模로 세워졌습니다. 首都의 北端 中央에는 宮闕과 主要 官廳들이 있는 南北 約 1.4km, 東西 約 1.2km의 大内裏(だいだいり)를 配置하고 이곳 中央에서 南北으로 가로지르는 幅 8.5m의 朱雀大路(すざくおおじ)를 놓아 東쪽을 左京, 西쪽을 右京로 부르며 바둑판과 같이 거리를 造成했습니다. 首都 建設 初期부터 各種 寺院과 貴族, 官僚, 庶民의 住居地가 있던 左京는 繁榮했던 半面 右京는 濕地帶가 많아 그다지 發達하지 못 했습니다. 平安京의 人口는 9世紀에 約 10~15萬 名 程度였습니다.
平安時代
桓武天皇이 首都를 平安京로 옮긴 794年부터 鎌倉幕府가 登場한 1192年까지의 約 400年 동안을 平安時代라고 합니다. 平安時代 初期에는 遣唐使(けんとうし)를 派遣하는 等 緊密한 關係를 維持하여 唐風이 流行했으나 唐나라가 衰退하는 9世紀 後半부터는 仮名(かな)文學과 淨土敎 寢殿 같은 日本的인 貴族文化가 發達하게 됩니다. 特히 文學에서는 女性의 活動이 두드러졌는데, 紫式部(むらさきしきぶ)의 ‘源氏物語(げんじものがたり)’와 清少納言(せいしょうなごん)의 ‘枕草子(まくら のそうし)’ 等은 이 時代의 代表的인 女流作家의 文學 作品입니다.
平安時代는 政治的으로 보면 매우 混濁했던 時代였습니다. 9世紀 後半에 들어 어린 天皇을 代身하여 政治를 하는 攝政과 成年이 된 天皇을 도우며 政務를 管掌하는 關白의 地位를 獨食한 藤原家門의 摂関政治(せっかんせいじ)가 極盛을 부리고 天皇의 자리에서 물러난 上皇이 政治에 깊숙이 關與하면서 混亂은 極에 達했습니다.
한便, 中央政府의 이러한 混亂은 地方의 管理疎忽로 이어져 武士의 亂立을 낳았고 여러 次例의 乱을 거쳐 平(たいら)家門이 中央政府로 進出하며 莫强한 權力과 富를 거머쥐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平(たいら)家門도 源(みなもと)家門과의 戰爭에서 敗하여 歷史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고 以後 武家政權에 依한 鎌倉幕府의 時代로 접어듭니다
作成者 黃圭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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