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장승업의 그림세계
![]() |
▶ 운림세동도(雲林洗桐圖)
이 작품은 중국 원대의 유명한 문인화가 예찬의 일화를 표현한 것이다. 예찬은 한 손님이 무심코 뱉은 침이 자기가 사랑하는 오동나무에 묻자, 그 손님이 간 후에 동자로 하여금 오동나무를 깨끗하게 씻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 일화는 일체의 더러움을 용납하지
못했던 예찬의 성품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서 그림으로 많이 표현되었다. 이 작품에서 예찬은 석상(石床)에 기대어 앉아 책을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고, 동자도 주인의 결벽한 성품이 우스운지 미소를 지은 채 나무 등걸을 닦고 있다.
인물이나 오동나무의 잎새 하나
하나를 깔끔한 선묘로 처리하였다. 장승업은 이 주제를 즐겨 다루어 비슷한 도상의 다른 작품들도 여러 점 남아 있다.
장승업의 작품은 산수 인물로 시작하여 새나 짐승, 골동품, 화초 등이 더할 나위 없이 세련되었을 뿐아니라, 속도감 있는 운필과 담담한 색상의 구사는 독특한 수지법과 준법을 이용한 교묘한 구도와 병행하여 자유적절하게 과장된 분방함을 갖추고 있다.
장승업(張承業), 족자 비단에 수묵담채,
142.2 x 40.3㎝, 호암미술관 소장 (기타해설)
본 그림은 예운림의 고사를 희화화 한 것이만 구도,인물묘사 ,수지법 등 해파화가 마로의 화보인 [시중화]를 임모한 작품이다. 왼편 아래쪽의 괴석 옆에 앉아 초연한 운림의 모습과, 이것과 서로 마주하고 있는 준열한 선으로 구성된 오동나무의 줄기와 동자 등 이러한 것들은 모두 화면에 생동감을 주고, 오동나무의 줄기는 뻗어 올라간 위쪽의 중심에서 왼쪽으로 화면을 채워, 화면을 안정시키고 있다.
해파의 화보를 임모하면서 비롯되었지만, 설채법이나 여러 특징적 묘사,분위기, 구도와 준법과 수지법 등 어디까지나 장승업 특유의 천재적 기량에 의한 것으로, 조선조 최후를 장식하는 화원의 작품으로서 손색이 없다.
|
|
비단에 담채 148.5*35cm |
![]() |
죽원양계(竹園養鷄) 술 좋아하고 무엇에도 얽매이기 싫어하던 활달한 장승업의 성격에 꼼꼼한 사실풍의 그림이 선뜻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양극은 서로 통한다는 진리를 생각해 보면 그가 이 같은 세밀화를 그린 것이 수긍이 간다.
이러한 세밀화는 주로 그의 후반기 작품에서 주로 나타난다. 실제 그의 산수화에서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변화를 보이는 주도 면밀한 채색법을 발견해 낼 수 있고, 수목의 표현에서도 송린 한 점 까지도 그려내는 치밀함을 찾아볼 수 있다. 대나무와 괴석이 있는 마당 가에서 닭들이 한가로이 모이를 쪼는 모습이다.어미닭이 병아리를 거느리고, 빛깔도 현란한 수탉이 무슨 기척을 들었는지 일가를 수호하려는 듯 꿋꿋한 기상으로 사방을 살피고 있다. 가장으로서 손색 없는 태도이다.맨드라미와 냉이, 개미취 등 풀꽃과 잡초들이 마당 가에 가득 돋아나 있어 닭들이 놀기에는 마땅한 공간인 듯하다.
|
|
|
|
![]() |
귀거래도 [歸去來圖] 장승업의 〈귀거래도〉는 중국 진(晉)나라 때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사〉의 내용을 바탕으로 그린 그림이다. 장승업 그림의 일반적인 특징처럼 위아래로 긴 화면에 전경에서 원경으로 급격하게 포개지듯 이어진 구도이다. 열린 사립문에는 병아리들이 한가로이 노닐고, 담벼락에는 수탉이 올라앉아 홰를 치고 있다. 멀리 보이는 산의 모양은 황공망이 그리는 법과 비슷하나, 세부 하나하나의 묘사가 좀더 치밀하다. 또한 바람에 나부끼는 가지의 표현 등에서 장승업의 활달한 필력을 느끼게 한다. 경물[景物]의 연속감을 유지하고 있는 작품으로 바람에나부끼는 나뭇가지의 표현에서 오원의 활달한 멋을 볼 수있다. 화법:비단에 담채 크 기:136cm x 32.5cm 소장처:간송미술관 |
| ||||
|

![]() 전(傳)<산수도(山水圖)> 자본담채, 16.6x21.7cm, 국립중앙박물관
동원 기증품인 이 <산수도>는 나무와 가옥의 표현법 등에서 기본적으로 화보식 남종화풍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필치가 좀더 자유분방해졌으며, 원산(遠山)에는 바탕 면을 이용한 연운(煙雲)을 두어 화면 전체에 생기를 주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남종화법을 완전히 습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점차 특유의 호방한 필묵법과 과장된 산형(山形) 묘사로 변모해가는 과도기적 면모를 보여준다.
|
![]() <삼국지 8폭병 중>, 20세기, 종이에 채색, 89×36㎝, 계명대박물관
소설 『삼국지연의』의 성립 이래 조조는 간교한 악의 화신이 되었다. 심지어 조조의 군사는 일본 순사들로 표현되기도 했다.
민화 <삼국지> 병풍 가운데 이 장면은 적토마를 탄 관우가 위나라 장수의 목을 베고 달리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적토마는 산 위를 날듯 거침없이 묘사되어 있고
적장의 목에서 뿜어 나오는 피는 관우의 용맹을 돋보이게 해준다.
산 뒤에 숨어 있는 위나라 군사들은 일본 순사 복장이다.
20세기 초반에 촉=유비·관우·장비=우리 편,
위나라=조조=일본·일본인 순사(적)라는 인식이 있었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흥미로운 예이다. |
|
<장판교 장비>(부분), 비단에 채색, 110×41㎝, 계명대박물관
조조의 대군을 홀로 맞이한 장비가 벼락과도 같은 호통으로 물러나게 한 유명한 장판교 장면이다.
『삼국지』에서 삼고초려, 적벽대전 등과 함께 가장 유명한 장면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검은 얼굴의 장비가 장판교 위에 유영하듯 떠서 호령하고,
조조와 군사들은 우물쭈물 갈피를 못 차리고 달아나고 있다.
파스텔 톤의 투명하고도 감각적인 색감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松下老僧圖
二僧觀龍圖 處士問仙圖 仙人採芝圖
雙馬人物圖 古士洗棟圖
이 작품은 중국 원말사대가(元末四大家) 중의 한 사람인 예찬(倪瓚)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예찬 은 결벽증이 매우 심하였는데, 자신이 손대는 것을 모두 청결하게 유지함은 물론이고, 계속해서 손 을 씻었으며 하인들을 시켜 정원에 있는 오동나무를 매일 깨끗이 닦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림은 상 ·하로 2분되어 있다. 화면 윗부분에는 과장되게 굴곡진 나뭇가지와 누렇게 물든 나뭇잎들이 돋보이 는 키 큰 오동나무가 화면 전체를 압도하며 서 있고, 나무 밑둥에는 한발을 나무에 딛고 열심히 나 무를 닦고 있는 동자가 보인다. 이와 대칭되는 화면 아래쪽에는 괴석 위에 걸터앉은 예찬이 동자를 쳐다보고 있다. 종(縱)으로 긴 화면의 아래에서 위쪽 끝까지 시선을 유도하는 능숙한 구도와 공간 활용이 탁월하며, 세련되고 적절한 설채(設彩)와 선묘(線描) 솜씨 또한 뛰어나다. 화면 위쪽의 제목 은 오원의 제자인 심전 안중식이 쓴 것이다. 三人間年圖
王羲之觀鵝圖,撫松盤桓圖
왕희지와 도연명을 소재로 한 고사인물화이다. 이 두 인물은 장승업이 즐겨 그렸 으나 이 작품 처럼 정세한 백묘법이 구사되어 있는 것은 드물다. 우선<왕희지 관아도>는 앞서 고려대 박물관 소장<왕희지>와 같은 주제를 다룬 것이지만 여기서는 왕희지가 물가 바위에 기대 앉아 부드 럽 게 헤엄치는 거위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그려져 있다. 왕희지의 얼굴에 드러난 신비로운 미소, 기대 앉은 자세의 자연스러움, 유려한 선묘로 묘사된 의습선의 아름 다움, 그리고 헤엄치는 거위 의 생동하는 모습 등에서 장승업의 뛰어난 기량을 엿볼 수 있다. 뒤쪽에는 기둥이 유난히 높은 기 와집이 있는데, 전혀 사실적이라 할 수는 없으나 오히려 과장과 단순화를 통해 생동감을 획득 하 였다. 한편 이와 동일한 소재를 견본담채로 더욱 정밀하게 묘사한 작품도 소개된 바 있다. 화면 위에는 19세기의 화가 춘방(春舫) 김영(金瑛:1837∼?)의 화제(畵題)가 적혀 있다. "두 마리 거위 가 목을 빼며 다가옴을 보자, 가슴 속의 묘한 생각 저절로 어우러지네. 아득히 천년 후에 벗을 숭 상하니, 이 뜻을 아는 이는 다만 황정견뿐이라네. 오원이 그리고 춘방이 보다." 도연명은<귀거래 사(歸去來辭)를 읊으며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하며 살았다.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일화들이 후대 회화의 소재로 애용되었는데, 이 작품은 그 중 "소나무를 쓰다듬 으며 머뭇거림(撫松而盤桓)"을 그린 것이다. 역시 인물의 생기있는 표정과 보석처럼 정교한 소나 무 묘사가 돋보인다 김영의 다음과 같은 화제가 있다. "사안은 오히려 대나무를 키우고, 도연명은 무슨 말로 벼슬자리를 버렸나? 만약 태평성대에 살아서 만난다면, 푸른 소나무 오래된 그림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 王羲之,老子
이 작품들은 <인물영모 10첩 병풍>(도22) 중 두 폭(제9·5폭)이다. 매폭에 안중식의 화제가 있다. 이 중<황희지>에는 1879년(37세) 연기(年記)가 있어 중기의 인물화 양식을 판단하는 데 좋은 참 고가 된다. 왕희지가 산음(山陰)의 도사에게 황정경(黃庭經)을 써 주고 거위를 얻었다는 고사를 표현하였다. 황희지가 동자에게 거위를 안긴 채 수염을 쓰다듬으며 흐뭇해하는 장면이다. 인물 의 모습과 의습선이 유려하고 자연스러운 필치로 그려져 있고, 진한 필선 위에 옅은 묵선을 잇대 어 강조하는 수법도 볼 수 있다. 이런 인물화의 묘법은 나중에 조석진과 안중식에 의해 계승되어 현대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아직 장승업의 원숙기 인물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기이한 안면, 신비로운 미소, 과장된 날카로운 의습선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노자>는 노자 가 청우(靑牛)를 타고 함곡관을 넘어갔다는 고사를 그린 것이다노자가 소를 탄 도상은 중국에서 는 송대 이전에 이미 형성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조선 후기와 말기의 작품이 많이 남아 있다. 이 작품은〈왕희지〉에 비해 아주 생략된 필묵법으로 그려져서 마치 선종의 감필체(減筆體)도석인 물화를 연상시킨다. 王羲之觀燕圖
앞의 고려대박물관 소장 병풍 중 두 폭의 인물화와 양식적으로 유사한 작품들이다. 그런데 이 두 폭은 인물의 기본적인 도상이 중국 청 말 상해(上海)에서 간행된 화보인《시중화(時中畵)》에서 본떠온 것이다. 인물들은 유려한 선묘로 자연스럽게 표현되었는데, 나중에 안중식, 조석진에 의해 계승된다. 그리고 특히 이 두 폭에 사용된 도상과 동일한 것이 안중식의 작품에서도 남아 있어 흥 미롭다.
산간의 개울가에서 두 인물이 서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그렸다. 나뭇가지의 일부가 화면 경계에 걸린 것으로 보아 원래는 더 큰 그림이었는데 가장자리가 잘려나간 것으로 보인다. 원래 어떤 고사 인물화였는지 지금 상태로는 잘 알 수 없다. 화법상 장승업의 특징적인 수지법(樹枝法)인 옹이가 많은 줄기나 손바닥을 편 것 같은 가지의 모습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중년기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