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동양화

[스크랩] 장승업의 그림세계

고목의향기 2014. 1. 2. 16:50

 

 

 

 
▶ 운림세동도(雲林洗桐圖)
 

이 작품은 중국 원대의 유명한 문인화가 예찬의 일화를 표현한 것이다. 예찬은 한 손님이 무심코 뱉은 침이 자기가 사랑하는 오동나무에 묻자, 그 손님이 간 후에 동자로 하여금 오동나무를 깨끗하게 씻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 일화는 일체의 더러움을 용납하지
못했던 예찬의 성품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서 그림으로 많이 표현되었다. 이 작품에서 예찬은 석상(石床)에 기대어 앉아 책을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고, 동자도 주인의 결벽한 성품이 우스운지 미소를 지은 채 나무 등걸을 닦고 있다.
 
인물이나 오동나무의 잎새 하나
하나를 깔끔한 선묘로 처리하였다. 장승업은 이 주제를 즐겨 다루어 비슷한 도상의 다른 작품들도 여러 점 남아 있다.  
 
장승업의 작품은 산수 인물로 시작하여 새나 짐승, 골동품, 화초 등이 더할 나위 없이 세련되었을 뿐아니라, 속도감 있는 운필과 담담한 색상의 구사는 독특한 수지법과 준법을 이용한 교묘한 구도와 병행하여 자유적절하게 과장된 분방함을 갖추고 있다.
 
장승업(張承業), 족자 비단에 수묵담채,
142.2 x 40.3㎝, 호암미술관 소장
 
(기타해설)
 
  본 그림은 예운림의 고사를 희화화 한 것이만 구도,인물묘사 ,수지법 등 해파화가 마로의 화보인 [시중화]를 임모한 작품이다. 왼편 아래쪽의 괴석 옆에 앉아 초연한 운림의 모습과, 이것과 서로 마주하고 있는 준열한 선으로 구성된 오동나무의 줄기와 동자 등 이러한 것들은 모두 화면에 생동감을 주고, 오동나무의 줄기는 뻗어 올라간 위쪽의 중심에서 왼쪽으로 화면을 채워, 화면을 안정시키고 있다.
 
  해파의 화보를 임모하면서 비롯되었지만, 설채법이나 여러 특징적 묘사,분위기, 구도와 준법과 수지법 등 어디까지나 장승업 특유의 천재적 기량에 의한 것으로, 조선조 최후를 장식하는 화원의 작품으로서 손색이 없다.
 


쌍마인물도(쌍馬人物圖)

견본담채, 124x33.6cm, 고려대박물관
장승업이 그린 그림 분야는 산수, 도석, 인물, 영모, 사군자, 절지 등 두루 미쳤으며, 전래된 작품은 대소를 불문하고 가작이 상당량에 이른다.
<쌍마인물>에는 장승업의 관서나 인은 없고 다만 뛰어난 화격과 화면의 오른쪽 상단에 있는 묵서에 의해 장승업의 그림으로 인정되는 작품이다.
세로로 긴 화면의 상단에 소방하고 거친 나무와 하단의 성근 풀을 배경으로 해서 중앙에 쌍마와 풍채가 예스럽고 고아한 인물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의 그림에서 낯익은 얼굴이다.
좁고 긴 화면은 오른쪽 상단을 비운 변각 구도이다.
수묵이 중심이 된 유려한 필선과 채색에 있어 선염이 뛰어나며, 특히 갈색과 옅은 자주색에 흰점이 박힌 말은 색 배합에 있어 독특한 효과를 보여준다.
도석과 영모의 기량을 아울러 살필 수 있는 그림이다.
단 한 점만의 독립된 그림이 아닌, 여러 폭으로 이루어진 고사인물도 병풍의 한 폭으로 생각된다
(기타 해설)
한 인물이 말 두 마리를 데리고 서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인물의 얼굴 모습은 눈이 가늘고 턱이 풍성하며 입술이 두터운데, 장승업의 인물화에서 자주 보이는 모습이다.
인물의 상반신이 풍선처럼 부푼 듯이 보인다. 말도 가슴과 둔부가 통통하게 살이 쪄서 역동적으로 보이는데, 이것도 역시 장승업이 즐겨 그리던 모습이다. 말의 콧잔등과 둔부에 흰색을 칠해 재미있는 강조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인물과 말의 생김새가 모두 내부적 생명력이 가득 찬 듯한 느낌을 준다.
위쪽의 힘찬 필묵으로 이루어진 잡목도 장승업의 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화면 위에는 호정(湖亭) 노원상(盧元相)이 김윤보(金允輔)의 찬문을 썼다.
 
"오원 선생의 진적은 세간에 드물다.
원하건대 안목이 있는 사람들은 서로
전하여 썩지 않기를 바란다."  
 
 
 

왕희지관아도(王羲之觀鵝圖)

 "바위 위에서 몸을 앞으로 내밀고, 물에서 노는 한 쌍의 거위에 시의를 얻는다"고 한 왕희지의 관아의 고사를 그린 것 같다.
 
  극단적으로 휘고 굽은 바위 주름, 특이한 표정의 인물, 기괴한 바위너설을 어긋매껴 굴절시키면서 점경으로 처리한 구도법, 이러한 것들이 모두 한데 어울려서 이 작품에 일종의 괴이한 분위기를 빚어내고 있다.
 
  이 작품 역시 해파 중 임이 계열인 마로의 화보[시중화]를 그대로 임모한 작품이다.
 
  고사의 특이한 얼굴 표정이나 번잡한 의습선, 각이진 바위 등은 화보를 임모하면서 나타난 특징이다.
 
  그는 민영익과 함께 청말기 해파의 영향이 보이는 인물로 우리나라에 있어서 산해지역 화풍의 수용을 알려주는 인물이다.
 
  이 [시중화] 는 근대기의 대다수의 화가들이 점경산수 인물이나, 인물화를 그릴 때 사용하는 화보로[해상명인화보] 등과 함께 청말기 해파의 수용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역시 그의 그림에 보이는 표출주의적인 경향은 분방하고 괴팍한 성격에 잘 부합된다고 하겠다.
 
장승업 (張承業), 족자 비단에 수묵,
143.5 x 41㎝, 한국 개인 소장
 
 

      

                                                           
비단에  담채        148.5*35cm

 


죽원양계(竹園養鷄)

 술 좋아하고 무엇에도 얽매이기 싫어하던 활달한 장승업의 성격에 꼼꼼한 사실풍의 그림이 선뜻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양극은 서로 통한다는 진리를 생각해 보면 그가 이 같은 세밀화를 그린 것이 수긍이 간다.

이러한 세밀화는 주로 그의 후반기 작품에서 주로 나타난다.
실제 그의 산수화에서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변화를 보이는 주도 면밀한 채색법을 발견해 낼 수 있고, 수목의 표현에서도 송린 한 점 까지도 그려내는 치밀함을 찾아볼 수 있다.

대나무와 괴석이 있는 마당 가에서 닭들이 한가로이 모이를 쪼는 모습이다.어미닭이 병아리를 거느리고, 빛깔도 현란한 수탉이 무슨 기척을 들었는지 일가를 수호하려는 듯 꿋꿋한 기상으로 사방을 살피고 있다.
 
가장으로서 손색 없는 태도이다.맨드라미와 냉이, 개미취 등 풀꽃과 잡초들이 마당 가에 가득 돋아나 있어 닭들이 놀기에는 마땅한 공간인 듯하다.
 
장승업(張承業), 족자비단에 채색, 74.9 x 31㎝, 간송미술관 소장

 
 

 
미산이곡 
종이에 담채      63*126cm


영모도 대련 [翎毛圖 對聯]
 
쌍치도(雙雉圖)
호취도(豪鷲圖)
 종이.수묵담채 / 各 135.5×55.0cm
    두 마리의  독수리가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모습의 우측 그림은한 마리가 화면 위쪽에 그려지고 나뭇가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자세를 취하고 있고 또 한 마리는 나뭇가지에서 한 발로 앉아 뒤를 돌아다 보고 있다.
독수리의 형태와 움직이는 자세가 매우 자연스럽고 생동감이 넘친다.

진한 먹과 엷은 먹을 자유롭게 구사하며 속도감있게 그어 나간  필선의 자신에 찬 움직임이 형상과 어울려 이루 말할 수 없는 시각적 쾌감을 느끼게 한다. 그림 전체에 흐르는 숙달된 대가의 기운이 흘러 넘치고 있다.


산수도   [山水圖]

129.5x32cm / 견본담채 / 서울개인소장
오원의 작품 중 비교적 차분한 그림이다.
윤묵[潤墨]과 담채법[淡彩法]이 돋보인다.


귀거래도 [歸去來圖] 

장승업의 〈귀거래도〉는 중국 진(晉)나라 때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사〉의 내용을 바탕으로 그린 그림이다.

장승업 그림의 일반적인 특징처럼 위아래로 긴 화면에 전경에서 원경으로 급격하게 포개지듯 이어진 구도이다.
열린 사립문에는 병아리들이 한가로이 노닐고, 담벼락에는
수탉이 올라앉아 홰를 치고 있다.

멀리 보이는 산의 모양은 황공망이 그리는 법과 비슷하나,
세부 하나하나의 묘사가 좀더 치밀하다.
또한 바람에 나부끼는 가지의 표현 등에서
장승업의 활달한 필력을 느끼게 한다.

경물[景物]의 연속감을 유지하고 있는 작품으로 바람에나부끼는 나뭇가지의 표현에서 오원의 활달한 멋을 볼 수있다.

화법:비단에 담채
크 기:136cm x 32.5cm
소장처:간송미술관

방황공방 산수도[ 倣黃子久 山水圖 ]

조선 19세기 후반 비단.수묵담채 / 151.2×31.0cm
오원(吾園) 산수도(山水圖)의 전형(典型)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吾園은 화첩의 소폭(小幅)보다도 병풍이나 종축을 많이 사용하였다.화면(畵面)을 지그재그식으로 구성하여 近*中*遠景을 구분하고 遠景의高山은 黃公望(子久)의 필법을 본받아 피마준으로 부드럽게 표현했으나中景의 나무에서는 그의 힘찬 筆力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약간의 과장이 있으나 그 깔끔함이 돋보인다.
조선 말기 화단을 풍미했던 천재 화가로 유명한 오원 장승업은, 일자무식의 비천한 신분이었지만 어깨 너머로 중국의 명화(名畵)들을 구경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신들린 듯 그림을 능숙하게 그리게 되었고, 임금에게 그림을 바칠 정도로 이름을 얻었다. 산수, 인물, 화조, 영모, 기명절지 등 거의 모든 화목(畵目)에 정통했던 오원은, 산수에 있어서도 각종의 남. 북종화법을 혼합한 개성 있는 산수화풍을 구사하였다. 중국 원말 사대가에 속하는 황공망(黃公望)의 필의(筆意)를 따른 이 작품도 그러한 경향을 반영하고 있는 전형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오원은 자신이 즐겨 사용하였던 좁고 긴 화면에, 경물을 짜임새 있게 구성하여 감상자의 시선이 화면 아래에서 위로 단계적으로 옮겨가도록 하였다. 꼼꼼하고 차분한 필묵법을 사용하여 전.중.후경의 어느 한 곳이라도 소홀함이 없이 완벽하게 그려내었는데, 정교한 선묘와 깔끔한 담채가 그림의 웅장함을 돋보이게 해주고 있다.
(기타해설)
 
장승업의 산수도 중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또한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하나
이다. 장승업은 세로로 긴 화폭을 즐겨 사용하였지만 이 작품은 비례상 특히 더 길다. 그래서인지 흔히 전경(前景)에 있던 무성한 숲을 중경(中景)에 배치하고전경에는 수면과 작은 언덕, 다리를 배치하였다. 또 전경과 중경 사이도 다리로
연결하여 멀리 후경(後景)까지 시점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특히 아름다운 곳은 후경의 주산(主山)이다. 안개에 싸인 높은 산의 모습을 아주 섬세한 필치로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화면위에 "방황자구묵법 오원 장승업(倣黃子久墨法 吾園 張承業)"이라는 관서가 있고, 화면 아래에 다시 "오원의황자구의(吾園擬黃子久意)"라는 제문이 있다.

송풍유수 [松風流水]

   족자 비단에 담채   137*32.2cm 
장승업이 활동하던 조선 말기는 추사 김정희가 길러낸 중인 계급의 지식층 문인들이 추사 예술의 지극히 조선적인 핵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외형적인 형사에 급급하여 맹목적인 중국풍의 호상이 유행하던 시기였고, 자연 그의 그림풍은 중국 취향이 농후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의 그림이 단순한 중국풍으로 외형만을 모방한 것이었던 것에 비하면, 비록 같은 중국풍이긴 하지만 그는 이응헌의 사랑방에서 어깨 너머로 보던 그림을 어느 날 갑자기 배우지도 않고 신들린 듯 그려낼 수 있었던 천재의 기질이 있었기에 그림 속에 번득이는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었다.

수백 길 벼랑 위에서 입을 열어 팔방으로 부딪치며 꺾어져 내리다가 마침내 아득히 쏟아져 내리고 마는 거폭 아래, 이에 맞서듯 창연히 솟아올라 검붉은 송린을 자랑하는 장송의 모습은 임금마저도 묶어 놓을 수 없었던 장승업의 호방불기한 기질을 말해 주는 듯하다.
 
소나무 밑 너럭바위에 마주 앉아 잠방이 차림에 가슴을 드러낸 채 폭포의 굉음을 들으며 찻물 끓기를 기다리는 선객들의 소탈 간략한 모습은 용트림하며 치솟은 소나무와 거폭에 압도당한 눈의 긴장감을 풀어주기에 충분하다.
 
  오원 장승업의 그림에서는 이처럼 화면에 숨막힐 듯 번득이는 박진한 생동감이 항상 넘쳐 흐르니, 이 점은 세간에 살면서 시속을 거부한 그의 대오한 자취일 것이다.
  
장승업의 작품은 현재까지 많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
  웅장한 스케일의 구도에 고도로 숙달된 치밀한 화법이 돋보이는  중국풍의 산수화다.  이는 장승업이 조선시대를 통틀어 웅장한 스케일을 화폭에 집약시켜 소화할 수 있는 몇 안되는 화가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서 참으로 아쉬운 점은 탁월한 기량에도그 화풍이 중국풍이라는 취약점이 있다.

 
<방황학산초추강도(倣黃鶴山樵秋江圖)>
1879년(37세), 지본수묵, 22x21.4cm, 서울대박물관
 
오세창이 편집했다고 전하는《근역화휘(槿域畵彙)》'지(地)'첩에 포함된 그림 이다.
이 작품은 위쪽에 "아무도 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 혼자 외로이 작은 배를 띄웠네. 기묘년 가을 본관이 대원인 장승업이 황학산초(왕몽)의 가을 경치 그림을 본따서 그렸다는 글이 있다.
 
이를 통해 1879년 장승업이 37세 때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원산과 근경 바위의 표현에 장승업의 특징인 꿈틀대는 듯한 생동감이 나타나 있어 그가 30대 중반 무렵에는 이미 자신의 산수화 양식을 완성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산수도의 기본 도상은《명공선보(名公扇譜)》에서 딴 것이다.
 
 
전(傳)<산수도(山水圖)> 자본담채, 16.6x21.7cm, 국립중앙박물관
 
 
동원 기증품인 이 <산수도>는 나무와 가옥의 표현법 등에서 기본적으로 화보식 남종화풍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필치가 좀더 자유분방해졌으며, 원산(遠山)에는 바탕 면을 이용한 연운(煙雲)을 두어 화면 전체에 생기를 주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남종화법을 완전히 습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점차 특유의 호방한 필묵법과 과장된 산형(山形) 묘사로 변모해가는 과도기적 면모를 보여준다.  
 

<삼국지 8폭병 중>, 20세기, 종이에 채색, 89×36㎝, 계명대박물관

소설 『삼국지연의』의 성립 이래 조조는 간교한 악의 화신이 되었다.
심지어 조조의 군사는 일본 순사들로 표현되기도 했다.

민화 <삼국지> 병풍 가운데 이 장면은 적토마를 탄 관우가 위나라 장수의 목을 베고
달리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적토마는 산 위를 날듯 거침없이 묘사되어 있고
적장의 목에서 뿜어 나오는 피는 관우의 용맹을 돋보이게 해준다.
산 뒤에 숨어 있는 위나라 군사들은 일본 순사 복장이다.
20세기 초반에 촉=유비·관우·장비=우리 편,
위나라=조조=일본·일본인 순사(적)라는 인식이 있었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흥미로운 예이다.
 

<장판교 장비>(부분), 비단에 채색, 110×41㎝, 계명대박물관
조조의 대군을 홀로 맞이한 장비가 벼락과도 같은 호통으로 물러나게
한 유명한 장판교 장면이다.
『삼국지』에서 삼고초려, 적벽대전 등과 함께 가장 유명한 장면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검은 얼굴의 장비가 장판교 위에 유영하듯 떠서 호령하고,
조조와 군사들은 우물쭈물 갈피를 못 차리고 달아나고 있다.
 파스텔 톤의 투명하고도 감각적인 색감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국내 미술품 경매 최고가 기록이 경신됐다. 23일 열린 서울옥션의 100회 경매에서 17세기 전반에 제작된 ‘철화백자운룡문호(鐵畵白磁雲龍文壺·37.6×48.5㎝·사진)’가 16억2000만원(수수료 별도)에 낙찰돼 이전까지 국내 경매 최고가 기록이었던 고려청자 매병(梅甁) ‘청자상감매죽조문매병’의 10억9000만원을 깼다.
철화백자는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까지 제작됐던 도자기의 한 종류. 그릇 표면에 염료 대신 철가루를 써서 그림을 그렸다. 이번에 출품된 철화백자에는 왕실에서 사용했음을 상징하는 삼족룡(三足龍)이 그려져 있고, 항아리 입구에서 바닥까지 이어지는 S자형 곡선과 용 무늬가 아름답다는 평을 받고 있다.

<풍림산수도(楓林山水圖)> 자본담채, 40x211.5cm, 서울대박물관
 
장승업의 산수화 중 가장 이른 양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원래는 횡권 형식이었으나 현재는 액자로 표구되어 있다.
 
가을철 단풍이 물든 숲과 이를 감상하는 인물의 모습을 그렸다.
 
화면 오른쪽 끝에 동자가 미는 수레를 탄 고사(高士)가 그려져 있으며,
화면의 나머지 대부분은 숲과 산으로 채워져 있다.
 
중국풍의 인물표현이나 호분(胡粉)을 바른 동자의 얼굴 모습, 그
리고 수지법(樹枝法) 등 일부에서 장승업의 특징적인 면이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초기적인 양상이 드러나 있다.
 
 
즉 세부 필치에서 특유의 호방함이 전혀 보이지 않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일관되어 있는 점,
다양하기는 하나 다소 부조화된 나무들의 형태,
 
화면 중앙과 좌측 아래의 숲의 비례상 부조화 등에서 화보식(畵譜式) 남종산수화풍을 조심스럽게 익혀나가는 초기 습작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화면 왼쪽 끝 아래에 '장승업인(張承業印)'이란 백문방인(白文方印)이 있다.
 
 
 
 
<세산수도(細山水圖)> 자본수묵, 16x21cm , 서강대박물관
 
장승업이 당시 유행하던 정형화한 남종산수화풍을 완벽하게 습득하였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아름다운 강변의 누각에 두 사람이 마주앉아 담소하고 있고, 강 위에는 이들을 태우러 오는 듯한 배 한척이 접근하고 있다. 때는 가을인 듯 강 건너에는 갈대가 우거졌고, 이 쪽 나무들 중 일부도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다.
원 말 사대가 중 예찬식의 구도와 필묵법을 사용하여 깔끔하고 투명하며 쓸쓸한 가을의 정취를 잘 표현하였다. 화면 가운데 접힌 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더 작은 화첩이었던 것 같다.
 
 

 

 

松下老僧圖

 

二僧觀龍圖


處士問仙圖


仙人採芝圖

 

雙馬人物圖


古士洗棟圖

 

이 작품은 중국 원말사대가(元末四大家) 중의 한 사람인 예찬(倪瓚)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예찬

은 결벽증이 매우 심하였는데, 자신이 손대는 것을 모두 청결하게 유지함은 물론이고, 계속해서 손

을 씻었으며 하인들을 시켜 정원에 있는 오동나무를 매일 깨끗이 닦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림은 상

·하로 2분되어 있다. 화면 윗부분에는 과장되게 굴곡진 나뭇가지와 누렇게 물든 나뭇잎들이 돋보이

는 키 큰 오동나무가 화면 전체를 압도하며 서 있고, 나무 밑둥에는 한발을 나무에 딛고 열심히 나

무를 닦고 있는 동자가 보인다. 이와 대칭되는 화면 아래쪽에는 괴석 위에 걸터앉은 예찬이 동자를

쳐다보고 있다. 종(縱)으로 긴 화면의 아래에서 위쪽 끝까지 시선을 유도하는 능숙한 구도와 공간

활용이 탁월하며, 세련되고 적절한 설채(設彩)와 선묘(線描) 솜씨 또한 뛰어나다. 화면 위쪽의 제목

은 오원의 제자인 심전 안중식이 쓴 것이다.


三人間年圖

 

王羲之觀鵝圖,撫松盤桓圖

 

왕희지와 도연명을 소재로 한 고사인물화이다. 이 두 인물은 장승업이 즐겨 그렸 으나 이 작품

처럼 정세한 백묘법이 구사되어 있는 것은 드물다. 우선<왕희지 관아도>는 앞서 고려대 박물관

소장<왕희지>와 같은 주제를 다룬 것이지만 여기서는 왕희지가 물가 바위에 기대 앉아 부드 럽

게 헤엄치는 거위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그려져 있다. 왕희지의 얼굴에 드러난 신비로운 미소,

기대 앉은 자세의 자연스러움, 유려한 선묘로 묘사된 의습선의 아름 다움, 그리고 헤엄치는 거위

의 생동하는 모습 등에서 장승업의 뛰어난 기량을 엿볼 수 있다. 뒤쪽에는 기둥이 유난히 높은 기

와집이 있는데, 전혀 사실적이라 할 수는 없으나 오히려 과장과 단순화를 통해 생동감을 획득 하

였다. 한편 이와 동일한 소재를 견본담채로 더욱 정밀하게 묘사한 작품도 소개된 바 있다. 화면

위에는 19세기의 화가 춘방(春舫) 김영(金瑛:1837∼?)의 화제(畵題)가 적혀 있다. "두 마리 거위

목을 빼며 다가옴을 보자, 가슴 속의 묘한 생각 저절로 어우러지네. 아득히 천년 후에 벗을 숭

하니, 이 뜻을 아는 이는 다만 황정견뿐이라네. 오원이 그리고 춘방이 보다." 도연명은<귀거래

(歸去來辭)를 읊으며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하며 살았다. 이와

련된 여러 가지 일화들이 후대 회화의 소재로 애용되었는데, 이 작품은 그 중 "소나무를 쓰다듬

며 머뭇거림(撫松而盤桓)"을 그린 것이다. 역시 인물의 생기있는 표정과 보석처럼 정교한 소나

묘사가 돋보인다 김영의 다음과 같은 화제가 있다. "사안은 오히려 대나무를 키우고, 도연명은

슨 말로 벼슬자리를 버렸나? 만약 태평성대에 살아서 만난다면, 푸른 소나무 오래된 그림으로

아오지 않으리라."


王羲之,老子

 

이 작품들은 <인물영모 10첩 병풍>(도22) 중 두 폭(제9·5폭)이다. 매폭에 안중식의 화제가 있다.

이 중<황희지>에는 1879년(37세) 연기(年記)가 있어 중기의 인물화 양식을 판단하는 데 좋은 참

고가 된다. 왕희지가 산음(山陰)의 도사에게 황정경(黃庭經)을 써 주고 거위를 얻었다는 고사를

표현하였다. 황희지가 동자에게 거위를 안긴 채 수염을 쓰다듬으며 흐뭇해하는 장면이다. 인물

의 모습과 의습선이 유려하고 자연스러운 필치로 그려져 있고, 진한 필선 위에 옅은 묵선을 잇대

어 강조하는 수법도 볼 수 있다. 이런 인물화의 묘법은 나중에 조석진과 안중식에 의해 계승되어

현대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아직 장승업의 원숙기 인물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기이한 안면, 신비로운 미소, 과장된 날카로운 의습선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노자>는 노자

가 청우(靑牛)를 타고 함곡관을 넘어갔다는 고사를 그린 것이다노자가 소를 탄 도상은 중국에서

는 송대 이전에 이미 형성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조선 후기와 말기의 작품이 많이 남아 있다. 이

작품은〈왕희지〉에 비해 아주 생략된 필묵법으로 그려져서 마치 선종의 감필체(減筆體)도석인

물화를 연상시킨다.



王羲之觀燕圖

 

앞의 고려대박물관 소장 병풍 중 두 폭의 인물화와 양식적으로 유사한 작품들이다. 그런데 이 두

폭은 인물의 기본적인 도상이 중국 청 말 상해(上海)에서 간행된 화보인《시중화(時中畵)》에서

본떠온 것이다. 인물들은 유려한 선묘로 자연스럽게 표현되었는데, 나중에 안중식, 조석진에 의해

계승된다. 그리고 특히 이 두 폭에 사용된 도상과 동일한 것이 안중식의 작품에서도 남아 있어 흥

미롭다.



山水人物圖

 

산간의 개울가에서 두 인물이 서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그렸다. 나뭇가지의 일부가 화면 경계에

걸린 것으로 보아 원래는 더 큰 그림이었는데 가장자리가 잘려나간 것으로 보인다. 원래 어떤 고사

인물화였는지 지금 상태로는 잘 알 수 없다. 화법상 장승업의 특징적인 수지법(樹枝法)인 옹이가

많은 줄기나 손바닥을 편 것 같은 가지의 모습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중년기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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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사진 과 인생
글쓴이 : 고을원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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