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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안녕 2009년 한결추천시- 20

고목의향기 2010. 5. 2. 12:28

안녕 2009년 한결추천시- 20을 아래와 같이 다시 읽는 시간을 갖을까 합니다

1671회 01.15  황규관   아픈사랑

1678회 01.12  김경미   첫눈      

1681회 01.15. 고은      혼자 술 마시다가

1685회 01.19  고영서   사랑

1701회 02.09  장정일   시청

1710회 02.16  김어수   봄비

1719회 02.28  손택수   자음

1740회 03.24  오규원   공산명월

1827회 06.08  정끝별   세상의 등뼈

1834회 06.15  나희덕   팔이 된 눈동자

1857회 07.10  신용목   스타킹

1867회 07.25  송재학   고기

1887회 08.22  김경주   바늘의 무렵

1891회 08.27  강만      하늘

1900회 09.05  임영석   양철지붕

1918회 09.25  문정영   자전거 도둑

1929회 10.11 고영민    책의 등

1937회 10.24  공광규   놀랜 강

1960회 11.19  고진하   호랑나비돛배

1971회 12.01  윤제림   재춘이 엄마

[출처] 안녕2009-한결추천시 다시읽기-20|작성자 한결


아픈 세상

 

황규관

 

없는 사람에게는 늘 아픔이 있다

먹구름 잔뜩 품은 하늘이

언제나 천둥을 만들어내듯

지상의 눈동자에 휘두를 번개를 깊이 품고 있듯

가난한 사람에게는 사랑도

아픔이거나 그 깊은 흉터다

허리에 침을 꽂고 엎드려 있는데

먹고살기도 힘든데 안 아픈 데가 없다는

중년 여자의 서글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픔을 낫겠다고 약도 먹고

침도 맞는 거겠지만

아픔은 항상 어디선가 샘솟는다

아니, 아파서 산다

청춘을 불로 지진 사랑이

식지 않은 분화구가 되어

더러는 아픔을 빛나게 증명하듯

사는 건 아픈 일이다 그러나

아프고 아파서 아픔이 웃을 때까지

천천히 가는 길이다

 

황규관 시집 『 패배는 나의 힘 』, [창비]에서





첫눈

 

김경미

 

하고 싶은 말 다 해버린 어제가 쓰리다

 

줄곧 평지만 보일 때 다리가 가장 아팠다

 

생각을 안했으면 좋겠다

 

 

김경미 시집 『고통을 달래는 순서 』,[창비]에서


혼자 술 마시다가

 

고은

 

파리채로

파리를 쳤다

 

놓쳤다

 

잘했다 잘했다 아주 잘했다

 

고은 시집 『허공』,[창비]에서


사랑

 

고영서

 

며칠째 목에 걸려 있는 가시

가만있으면

아무렇지 않다가도

침을 삼킬 때마다 찔러대는 가시

손가락을 넣으면

닿을 듯 말 듯

더 깊이 숨어버리는

 

잊는다 잊는다 하면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견딜 만큼 아픈,

당신

 

고영서 시집 『기린 울음 』,[삶이 보이는 창]에서


시청

 

장정일

 

시청에서 볼일을 본다

소환이 아닌 자진출두 형식으로

수속이고 조회고 필요 없는 볼일이다

고압적으로 느꼈던 시청이

볼일을 보면서부터

친근하게 느껴진다

수수료나 과태료는 물론 없고

발명록(출입록?)도 없다

줄을 서 채 기다리지도 않았다

볼일을 보고 손을 씻는다

청백리처럼 공손히 서 있는 시청

그것이 필요악이면 이해가 안된다.

 

관청은 화장실이거나 목욕탕 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 관청이 필요악이라고 불리는 게 정말 이해가 안 된다.

 

장정일 시집 『주목을 받다 』,[김영사]에서

 


 

봄 비

 

김어수

 

꽃잎 지는 뜨락 연두빛 하늘이 흐르다

세월처럼 도는 선율 한결 저녁은 고요로와

그 누구 치맛자락이 스칠 것만 같은 밤.

 

저기 아스름이 망울지는 여운마다

뽀얗게 먼 화폭이 메아리쳐 피는 창 가

불현듯 뛰쳐 나가서 함뿍 적고 싶은 마음.

 

놀처럼 번지는 정 그 계절이 하 그리워

벅찬 숨결마다 닮아 가는 체념인가

호젓한 좁은 산길을 홀로 걷고 싶은 마음.

 

안도섭 편저 『영원한 나의 애송시 』,[헤원출판사]에서

 

자음

 

손택수

 

밭일 하시던 할아버지가 땅에

지겟작대기로 'ㄱ'

이라고 썼다

그러곤 크게 따라 읽으라고

침방울을 튀기며 'ㄱ'

온몸으로

외쳐보라고 하셨다

내 최초의 받아쓰기

지겟작대기 끝에서 나온 자음

흙냄새 폴폴 묻어나던 소리

'ㄱ'위에서

씨앗 꽉 문 고추와

입천장 데며 먹던 고구마 노란 속살이 태어났다

허리 구부정한 'ㄱ'

지게를 지고 저녁연기 오르는 마을을 향하여

돌아오시던 할아버지

허리가 펴지지 않은 채 땅에 묻히셨다

기름진 자음이 되셨다

 

손택수 시집 『목련 전차 』,[창비]에서

 

空山明月

 

오규원

 

달이 나무 잎사귀를 툭툭 치며 간다

달이 빈 가지에 걸터앉아 몸을 흔들다가

간다 아무도 잠깨어 마주 오지 않는다 무덤 위에 앉아

담배 한 대 피우며 空山의 물소리 속에

모래들만 몸 푸는 아득한 소리를 듣는다

팔짱을 끼고 산길에 버티어 서서

사라지고 없는 산의 길을 불러모은다

부르는 소리에 송장메뚜기가 풀 속으로 숨고

기댈 곳 없는 풀이 달 속에 누울 때

空山의 달은 잠깨지 않는 길을 혼자 간다

터벅터벅 간다 잎을 치며 간다 가지를

흔들며 간다 나무들은 잠속에서 발소리를 듣는다

잠깨라 잠깨라 하는 空山 깊은 계곡의 물소리

 

오규원 시집 『사랑의 감옥 』,[문학과지성사]에서

 

세상의 등뼈

 

정끝별

 

누군가는 내게 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입술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어깨를 대주고

 

대준다는 것, 그것은

무작정 내 전부를 들이밀며

무주공산 떨고 있는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져

더 높은 곳으로 너를 올려준다는 것

혈혈단신 땅에 묻힌 너의 뿌리 끝을 일깨우며

배를 대고 내려앉아 너를 기다려준다는 것

 

논에 물을 대주듯

상처에 눈물을 대주듯

끝모를 바닥에 밑을 대주듯

한생을 뿌리고 거두어

벌린 입에

거룩한 밥이 되어준다는 것, 그것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

 

정끝별 시집 『와락』,[창비]에서 

 


 

팔이 된 눈동자

 

나희덕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자

일제히 횡단보도를 건너가기 시작하는 사람들,

꽁치떼 속에 끼여든 한 마리 멸치처럼

무언가 다른 전파를 보내는 존재가 있다

유난히 키가 작은 한 사람,

얼굴은 붉게 일그러지고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팔 대신 눈동자를 위아래로 흔드는 사람,

흙투성이가 된 눈동자로

열심히 허공을 닦으며 걸어가는 사람,

그의 움직이지 않는 소매 속은 텅 비어 있을 것이다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고

횡단보도를 반밖에 건너지 못한 사내는

필사적으로 눈동자를 흔들어댔다

 

나희덕 시집 『 야생사과』,[창비]에서

 




스타킹

 

신용목

 

마네킹 다리가 거꾸로 뻗어 있다

멀리 별을 밟았다

발을 든 모양이다

 

족발은 또 족발끼리 모여

모퉁이처럼 쌓인 풍경 속

 

다리 잘린 몸통들이 어둠의 거죽을 두르고

뛰어다녔다 그전에,

슬쩍 검은 스타킹을 신겨둔다

 

그전에 붉은 솥에 푹 고아둔다

 

두쪽 발굽에 딱딱하게 말라붙은

발자국 한꺼풀씩 벗겨

저자의 거리로 내보낼 수는 없나 내보내

문양으로 새길 수는 없나

 

밤이 되면

하늘에 막혀 있던 못들

와르르 빠지고

풍경을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났다

발자국은 그런 것- 풍경을

지상에 걸었던 자국

 

못은 언제 헐거워졌을까?

 

풍경들이 지나간다 모두

까만 스타킹을 신었다 벗겨보면

빨갛게 삶겨 있었다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들이

족발을 들었다

껌을 건네며 다가서는 노인의 밤,

어디에 썰어놓아도

아무도 발라가지 않는,

 

껌딱지처럼 떨어지지 않는

별자리 단단한

못자국 앞에서

 

모두들 말이 없었다 족발들이 수북이

신고 있는 까만 스타킹

 

신용목 시집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창비]에서

 



 

 




고기

 

송재학

 

어머니 모시고, 말없이

질긴 고들개 씹다가 갑자기 쓸데없는 생각

씹던 고기를 가만히 뱉아서 바라보니 그냥 삼켰으면 좋은 것을

 

송재학 시집 『푸른빛과 싸우다 』,[문학과지성사]에서

 



바늘의 무렵

 

김경주

 

  바늘을 삼킨 자는 자신의 혈관을 타고 흘러다니는 바늘을 느끼면서

죽는다고 하는데

 

  한밤에 가지고 놀다가 이불솜으로 들어가버린 얇은 바늘의 근황 같

은 것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끝내 이불 속으로 흘러간 바늘을 찾지 못한 채 가족은 그 이불을 덮

고 잠들었다

 

  그 이불을 하나씩 더나면서 다른 이불 안에 흘러 있는 무렵이 되었다

  이불 안으로 꼬옥 들어간 바늘처럼 누워 있다고, 가족에게 근황 같은

것도 이야기하고 싶은 때가 되었는데

 

  아직까지 그 바늘을 아무도 찾지 못햇다 생각하면 입이 안 떨어지는

가혹이 있다

 

  발설해서는 안되는 비밀을 알게 되면, 사인(死因)을 찾아내지 못하도

록 궁녀들은 바늘을 삼키고 죽어야 했다는 옛 서적을 뒤적거리며

 

  한 개의 문(門)에서 바늘로 흘러와 이불만 옮기고 살고 있는 생을, 한

개의 문(文)에서 나온 사인과 혼동하지 않기로 한다

 

  이불 속에서 누군가 손을 꼭 쥐어줄 때는 그게 누구의 손이라도 눈물

이 난다 하나의 이불로만 일생을 살고 있는 삶으로 기꺼이 범람하는 바

늘들의 곡선을 예우한다

 

창작과 비평  - 2009 가을호』,[창비]에서 

 





하늘

 

강만

 

하늘이 세상을 누르고 있다

산과 나무와 마을과 사람들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고 있다 하늘이 없었다면

세상의 것들은 함부로 풍선처럼 떠올랐을 것이다

서로 부딪히며 난장판이 되었을 것이다

저렇게 하늘이 세상을 지그시 누르고 있어서

집들도 제자리에 말뚝을 박아 마을을 이루고

사람들도 뿌리를 내려 나무처럼 순하게 살고 있다

오늘도 자꾸 둥둥 떠오르는 나를

하늘은 푸른 손으로 지그시 누르며 다독인다

참아라

때가 올 것이다.

 

계간 『시선, 2009 가을호 』,[시선사]에서

 



양철 지붕

 

임영석

내 친구 술 한 잔 건 하게 마시고 취하면

마누라 잔소리 소나기 오는 날 양철지붕같이 시끄럽다고 한다

햇볕이 쨍쨍한 날이면 너무나 뜨거워 곁에 가기가 무섭다고 한다

흰 눈이 푹푹 쌓이는 날이면 아이들 쥐어 잡는 게 치가 떨린다고 한다

처음부터 양철 지붕을 얹고 산 게 잘못이라 한다

하늘만 가리고 살면 두 몸 흉 될 게 없어 보였는데

한 이불 덮고 살면서 채워줄 수 있는 건 한가지뿐이었으니

그놈의 양철 지붕이 마누라 성질 다 버려 놓았다고 한다

그래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너, 마누라가 양철 지붕인 것 알고 사니 다행이다

난, 그 양철지붕도 없이 산다 인마, 

 

 

임영석 시집 『 고래 발자국 』,[종려나무]


자전거도둑

 

문정영

 

사슬 묶는 것을 잊어 버렸다

바퀴 두 개만 있으면 좁은 길도 갈 수 있다는 그는

늘 집 밖에 생각을 두었다

차라리 잘 된 것일까

나무와 나무 사이를 맴돌던 그의 바큇살이

뭉클해지던 날,

나는 그를 애써 외면했었다

다시 돌아와야 할 지점을 둔 그의 몸에서

사슬이 덩그렁거렸다

 

바람 없는 날에는 그리움을 불어넣었다

식은 안장은 햇살로 데우고

빡빡한 날들에 기름칠을 했다

가야할 거리는 입력하지 않았다

늘 지나치던 골목을 지웠을 뿐이다

돌아오는 길목의 사슬을 풀어버린 후

 

나무와 나무 사이 길 하나가 생겼다

그 길로 내 마음을 싣고 간 이 누구인가

 

문정영 시집 『 낯선 금요일 』,〈시선사 〉에서

책의 등

 

고영민

 

책꽃이에 책들이 꽂혀 있다

빽빽이 등을 보인 채 돌아서 있다

등뼈가 보인다

 

등을 보여주는 것은

읽을거리가 있다

아버지가 그랬고

어머니가 그랬다

절교를 선언하고 뛰어가던

한 시대와 역사가 그랬다

 

등을 보이는 것은 지는 것이 아니다

잠깐 다른 곳을 보는 것이다

옷을 갈아입는 네가

부끄러울까봐

멋쩍게 돌아서주는 것이다

 

고영민 시집 『공손한 손 』, 〈창비 〉에서

놀랜 강

 

공광규

 

강물은 몸에

하늘과 구름과 산과 초목을 탁본하는데

모래밭은 몸에

물의 겸손을 지문으로 남기는데

새들의 지문 위에

발자국 낙관을 마구 찍어대는데

사람도 가서 발자국 낙관을

꾹꾹 직고 돌아오는데

그래서

강은 수천 리 화선지인데

수만리 비단인데

해와 달과 구름과 새들이

얼굴을 고치며 가는 수억 장 거울인데

갈대들이 하루 종일 시를 쓰는

수십억 장 원고지인데

그걸 어쩌겠다고?

쇠붙이와 기계소리에 놀라서

파랗게 질린 강

 

 

《제4회 윤동주시상 수상작품》

통일문학 2009 겨울호 〈2009년 상반기 시분야 문학상 주요 수상작품 〉중에서

호랑나비돛배

 

고진하

 

홀로 산길을 오르다 보니,

가파른 목조계단 위에

호랑나비 날개 한 짝 떨어져 있다.

문득

개미 한 마리 나타나

뻘뻘 기어오더니

호랑나비 날개를 턱, 입에 문다.

그러고 나서

제 몸의 날개를 번쩍 쳐드는데

어쭈,

날개는 근사한 돛이다.

(암, 날개는 돛이고말고!)

바람 한 점 없는데

바람을 받는 돛배처럼

기우뚱

기우뚱대며

산길을 가볍게 떠가고 있었다.

개미를 태운

호랑나비돛배!

 

고진하 시집 『 수탉 』,《민음사 》에서

재춘이 엄마

 

윤제림

 

재춘이 엄마가 바닷가에 조개구이집을 낼 때

생각이 모자라서, 그보다 더 멋진 이름이 없어서

그냥 '재춘이네'라는 간판을 단 것은 아니다.

재춘이 엄마뿐이 아니다

보아라, 저

갑수네, 병섭이네, 상규네, 병호네.

 

재춘이 엄마가 저 간월암(看月菴) 같은 절에 가서

기왓장에 이름을 쓸 때,

생각나는 이름이 재춘이밖에 없어서

'김재춘'이라고만 써놓고 오는 것은 아니다.

재춘이 엄마만 그러는 게 아니다

가서 보아라, 갑수 엄마가 쓴 최갑수, 병섭이 엄마가 쓴 서병섭,

상규 엄마가 쓴 김상규, 병호 엄마가 쓴 엄병호.

 

재춘아, 공부 잘해라!

 

윤제림 시집 『그는 걸어서 온다 』,《문학동네 》에서

출처 : 좌도시
글쓴이 : 한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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