女さむらい只今參上-美空ひばり
作詞 関沢新一 作曲 ㅡ万城目 正
一
雨か嵐か 勤王佐幕
今日も鳴る鳴る あけの鐘
踊り扇を 白刃に変えて
花にひとさし 剣の舞
女さむらい 只今参上
ニ
蝶よ花よと 箱入り娘
捨てて大江戸 七つだち
父に見せたい 若衆姿
富士を背にして 東海道
女さむらい 只今参上
三
斬って捨てよか そのまま行こか
五十三次 ひとり旅
腰の大小 嵐を超えて
明日は待たるる 日本晴れ
女さむらい 只今参上
日本の歴史 源平合戦
事件槪要
1180年 4月 9日~1185年 3月 24日. 平安時代 末期인 1179年, 平清盛(たいらのきよもり)가 後白河天皇(ごしらかわてんのう)을 幽閉시키는 事件을 契機로 平(たいら)政權은 民心을 잃게 되고, 友好的인 關係에 있던 寺院勢力과도 對立하게 됩니다. 以後 平治の乱(へいじのらん) 當時 平 家門에게 敗하여 伊豆로 달아났던 源頼朝(みなもとのよりとも)가 地方의 武士들과 힘을 合쳐 蜂起를 일으키며 ‘源平の戦争’이 始作됩니다.
戰爭の導火線と平氏討伐命令
1180年 4月 9日, 上皇의 아들 以仁王(もちひとおう)는 各地의 源氏에게 平氏 討伐命令을 내립니다. 하지만 事前에 發覺되어 平清盛에게 쫓기게 되고, 이를 避해 園城寺(おんじょうじ)로 몸을 숨긴 後 源頼政(みなもとのよりまさ)의 軍隊와 合流하여 反 平氏의 깃발을 내겁니다.
同年 5月 26日, 以仁王와 頼政는 平知盛(たいらのとももり), 平重衡(たいら のしげひら)가 이끄는 平氏의 大軍과 宇治川(うじがわ)를 사이에 두고 戰鬪를 치릅니다. ‘橋合戦(はしかっせん)’으로 불리는 이 戰鬪에서 數的 劣勢에도 奮鬪하지만 結局 이를 克服하지 못하고 둘 모두 죽음에 이릅니다. 源頼政의 擧兵은 不足한 準備와 군사로 因해 失敗했지만 이 일로 因해 平氏 討伐에 불이 붙게 됩니다.
戰爭の流れ
橋合戦 以後 伊豆에서 虎視眈眈 때를 기다리던 源頼朝는 丈人인 北条時政(ほうじょうときまさ)의 힘을 빌려 兵士를 모아 平氏 討伐을 始作합니다
石橋山(いしばしやま) 戰鬪(1180年 8月)
源頼朝의 擧兵 以後 벌인 最初의 戰鬪. 源頼朝는 只今의 神奈川県 小田原(おだわら) 附近의 石橋山(いしばしやま)에서 大庭景親(おおばかげちか)와 戰鬪를 벌이지만 大敗하여 只今의 千葉県 南部인 安房(あわ)로 逃亡친 後 再次 擧兵을 圖謀합니다.
富土川戰鬪(1180年 9月)
平氏 政權에 操縱 當하던 朝廷은 源頼朝 討伐을 내걸고 平維盛(たいらのこれもり)를 總大將으로 하여 軍隊를 派兵합니다. 平維盛는 富土川를 사이에 두고 再次 擧兵한 源頼朝와 對峙하는데, 늦은 밤 강을 떠다니던 물새들이 一齊히 날아오르는 소리를 듣고 敵의 奇襲으로 錯覺, 싸워보지도 못 하고 부랴부랴 平安京로 後退합니다.
砺波山(となみやま) 戰鬪(1183年 5月)
源頼朝와 함께 勢力을 擴張해나가던 源義仲(みなもとのよしなか)를 牽制하기 爲해 平氏는 平維盛(たいらのこれもり)와 平通盛(たいらのみちもり)를 隊長으로 10萬 大軍을 派兵합니다. 砺波山 附近에서 平氏軍과 對峙한 源義仲는 이들을 좁은 地域으로 誘引해 溪谷으로 떨어뜨릴 計劃을 세우고 戰鬪를 始作. 어둠이 깔리자 源義仲軍은 平氏軍을 包圍하고 一齊히 喊聲을 질러 威脅합니다. 이 喊聲을 들은 平氏軍은 源義仲의 計劃대로 어둠 속에서 길을 헤매며 溪谷 쪽으로 後退, 結局 大部分의 軍士들이 溪谷 아래로 떨어져 戰死합니다.
一ノ谷戰鬪(1184年 2月)
源氏 平安京 入城 以後 福岡의 大宰府(だざいふ)까지 避身했던 平氏는 一ノ谷에서 勢力을 키우며 源氏에 對備합니다. 그러자 源氏는 이를 치기 爲해 源 範頼(みなもとののりより) 源義経(みなもとのよしつね)를 둘로 나누어 一ノ谷로 派兵. 神戸市 北部의 산길 鹎越(ひよとりこえ)를 넘어 뒤로 돌아온 源義経에게 뜻밖의 奇襲을 當한 平氏軍은 混亂에 빠지고, 源範頼와도 攻防을 거듭한 끝에 敗하여 四国의 屋島(やしま)로 後退합니다.
屋島(やしま)戰鬪(1185년 2월)
一ノ谷에서 敗한 平氏는 屋島에 陣을 치고 水軍이 없던 源氏를 威脅합니다. 하지만 源義経는 小數의 兵士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屋島로 들어가 平氏군 陣營을 急襲합니다. 이에 놀라 바다로 逃亡친 平氏軍은 敵이 小數라는 것을 알고 海戰을 벌이 지만 結局 敗하여 全 軍艦을 이끌고 마지막 激戰地인 壇ノ浦로 向합니다.
壇ノ浦戰鬪(1185年 3月)
源平 最後의 戰鬪는 壇ノ浦에서 펼쳐진 海戰. 急流地域인 関門(かんもん)海峽에서 펼쳐진 戰鬪는 이침 6時부터 激烈하게 치러졌지만 午後가 되면서 戰勢가 源氏쪽으로 기울어갑니다. 結局 戰勢가 不利해지고 더 以上 물러설 곳이 없어진 平氏 陣營에서는 바다로 뛰어들어 목숨을 끊는 者가 續出했는데, 여기에는 아직 여덜살인 安德天皇도 함께 있었습니다. 이 戰鬪를 끝으로 平安時代 中期를 호령했던 平氏政權은 歷史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源平戰爭 以後
戰爭에서 勝利한 源頼朝는 以後 後白河上皇과 權力鬪爭을 하면서 서서히 實權을 掌握해 나갑니다. 그리고 1192年, 미침내 征夷大將軍으로 就任하여 日本 最初의 武家政權인 鎌倉幕府를 열고 모든 權力의 實質的인 支配者가 됩니다.
이 戰爭과 關聯하여 생긴 말 中에 ‘紅白(こうはく)’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平氏와 源氏 두 家門이 各各 戰鬪에서 붉은色과 흰色의 軍旗를 使用 한데서 由來되었답니다. 요즘도 日本에서는 體育大會 等에서 便을 가를 때 ‘紅팀’과 ‘白팀’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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