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景(춘경) 봄 경치 -金三宜堂(김삼의당)
何處春歸盡
하처춘귀진
東園一夜風
동원일야풍
羅衣窓外出
나의창외출
閑拾落來紅
한습락래홍
어디서 봄이 돌아왔는지
동산에 밤새도록 바람 부노라
비단 옷 입고서 창 밖에 나가
떨어진 붉은 꽃 한가히 줍는다.
김삼의당(金三宜堂, 1769-1823)은 전라도 남원의 서봉방(棲鳳坊)에서 태어났다.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2-1498)의 후손인 김인혁(金仁赫)의 딸이며, 담락당(湛樂堂) 하립(河笠)의 부인이다. 삼의당은 어려서부터 재예에 뛰어나 여공의 틈틈이 책을 놓는 일이 없어 일찍이 중국의 시문집을 비롯하여 경서며 사기류를 널리 섭렵하였다. 삼의당과 하립은 남원 출신인데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태어났다고 한다. 두 사람의 집안은 존경받는 학자 집안이었으나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던 데다가, 하립이 번번이 과거에 낙방하자 서른 살이 넘어서 낙향하였다. 부부는 진안(鎭安)에 땅을 마련하여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책을 읽고 시문을 화답하며 살았다. 삼의당은 평생을 유교적인 규율과 부도(婦道)를 지키며 일생을 마쳤다
南浦(남포) - 王安石(왕안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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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髮蕭蕭霜滿肩
백발소소상만견
送春未免意留連
송춘미면의유련
牡丹看到三更盡
모단간도삼경진
半爲憐花半自憐
반위련화반자련
어깨 위에 백발을 서리처럼 드리우고
이 봄 보내는 쓸쓸한 마음
밤이 늦도록 모란꽃 지켜보는 것은
반은 꽃 서러워 반은 나 서러워서라네.
袁枚(원매 1716-1797)청대시인、산문가 자는 자재(子才). 호 간재(簡齋) ·수원(隨園). 저장성(浙江省) 첸탕현[錢塘縣] 출생. 1739년 진사에 합격하여 장쑤성[江蘇省] 여러 현의 지사를 역임하면서 치적을 쌓았고, 1755년에 관직에서 물러났다. 장닝[江寧]의 소창산(小倉山)에 저택을 구입하여 이를 수원이라 이름하였으므로 이후 수원선생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재야의 시인으로서 많은 남녀 제자를 거느리고, 궁정파의 심덕잠(沈德潛)과 함께 건륭제(乾隆帝) 시대의 시단을 양분하는 세력을 이룩하였다.
그는 성령설(性靈說)을 주장하여 복고주의적 사조에 반대하였고, 시는 성정(性情)이 유로(流露)하는 대로 자유롭게 노래해야 하며, 고인(古人)이나 기교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고문(古文) ·변문(騈文)에도 뛰어나 시문집으로 소창산방집(小倉山房集)과 시론으로 수원시화(隨園詩話))가 있다. 그의 생활태도는 쾌락주의적이었으며, 미식가(美食家)로서도 알려져 수원식단(隨園食單)1권을 남기기도 하였다.
寒梅(한매)- 王安石(왕안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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哭淵泉老爺(곡연천노야) 연천 낭군을 곡하다-雲楚 金芙容(운초 김부용)
風流氣槪湖山主
풍류기개호산주
經術文章宰相材
경술문장재상재
十五年來今日淚
십오년래금일루
峨洋一斷復誰裁
아양일단부수재
풍류와 기개는 호산의 주인이요
경술과 문장은 재상의 재목이었네
15년 정든 임 오늘의 눈물
끊어진 우리 인연 누가 다시 이어 줄고
都是非緣是夙緣
도시비연시숙연
旣緣何不趂衰前
기연하불진쇠전
夢猶說夢眞安在
몽유설몽진안재
生亦無生死固然
생역무생사고연
인연 아닌 인연을 맺어온 인연
피치 못할 인연이면 젊어서나 만나지
꿈속에서 꿈을 꾸니 진실은 어디 있나
살아도 산 게 아니요 진실로 죽은 것을
水樹月明舟泛泛
수수월명주범범
山房酒宿鳥綿綿
산방주숙조면면
誰知燕子樓中淚
수지연자누중누
洒遍庭花作杜鵑
쇄편정화작두견
달 밝은 수정에 배는 둥둥 떠 있고
술 익은 산방에 새는 지저귀는데
누각에서 홀로 우는 남모르는 이 슬픔
방울방울 뿌리는 눈물 두견화로 피어나리.
金雲楚(김운초, 1820? -1869? )는 성천 출신의 기녀로 부용(芙蓉), 부용당(芙蓉堂)또는 추수(秋水)이다. 양반인 선고(先考)는 당호가 추당(秋堂)인데 일찍 부모를 여의었으며 깊은 학식을 갖춘 중부(仲父)밑에서 자상한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고향은 평안도 성천 시명(詩名)은 운초(雲楚).초당마마, 별호는 추수 추낭이며 작품집 운초집(雲楚集) 작품으로는 憶家兄(억가형) 五江樓小集(오강루소집) 待黃岡老人(대황강노인) 등이 전하고 있다.송도의 황진이(黃眞伊)와 부안의 이매창(李梅窓)과 함께 조선시대 3대 詩妓(시기)로 불리운다. 어려서 문장가인 숙부에게 어려서 글을 배워 16세에 성천군 백일장에서 시로 장원을 하였으며, 정조 때 성천 부사로 유명한 시인이며 판서 였던 연천(淵泉) 김이양(金履陽)(1755∼1845)의 소실로 들어가 양처가 되었으며, 거문고를 타고 시문을 지으며 여생을 보냈다. 운초의 시는 일반적으로 기녀시가 갖고 있는 병적 요소가 적고, 표현이 밝으며 청량감이 있다고 한다.59 년이나 연상인 연천(淵川) 김이양(金履陽)을 만나 소실이 되면서 당시 명사들과 자리를 함께하며, 타고난 시적 재능을 발휘하게 되고 많은 한시를 남겼다.김부용(金芙蓉)은 평안도 성천에서 가난한 선비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고 한다. 네 살 때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 살 때 당시(唐詩)와 사서삼경에 통하였고 열 살 때 부친을 여의고 그 다음해 어머니마저 잃으니, 부용은 어쩔 수 없이 퇴기의 수양딸로 들어가 기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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