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님의 시모음>
간판 없는 거리
정거장 플랫홈에
내렸을 때 아무도 없어
다들 손님들뿐
손님 같은 사람들뿐
집집마다 간판이 없어
집 찾을 근심이 없어
빨갛게
파랗게
불붙는 문자(文字)도 없이
모퉁이마다
자애로운 헌 와사등(瓦斯燈)에
불을 켜놓고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 사람들
다들 어진 사람들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서로 돌아가고
개
눈 위에서
개가
꽃을 그리며
뛰오
겨울
처마 밑에
시래기 다래미
바삭바삭
추워요
길바닥에
말똥 동그라미
달랑달랑
얼어요
그 여자
함께 핀 꽃에 처음 익은 능금은
먼저 떨어졌습니다
오늘도 가을바람은 그냥 붑니다
길가에 떨어진 붉은 능금은
지나는 손님이 집어갔습니다
눈 오는 지도
순이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처럼 창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위에 덮인다
방안을 돌아다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과 천정이 하얗다
방안에까지 눈이 내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처럼 홀홀이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 너는 내 마음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고만 발자국에 눈이 자꾸 나려 덮여 따라 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국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국을 찾아 나서면 일년 열 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나리리라.
달 같이
연륜이 자라듯이
달이 자라는 고요한 밤에
달 같이 외로운 사랑이
가슴 하나 뻐근히
연륜처럼 피어나간다
또 다른 고향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는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게다
가자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명상
가출가출한 머리칼은 오막살이 처마 끝
쉬바람에 콧마루가 서운한 양 간질키오
들창 같은 눈은 가볍게 닫혀
이 밤에 연정은 어둠처럼 골골이 스며드오
무서운 시간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한번도 손 들어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나를 부르지 마오
반디불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 주우러
숲으로 가자
그믐달 반디불은
부셔진 달조각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 주우러
숲으로 가자
밤
외양간 당나귀
아-ㅇ 외마디 울음 울고
당나귀 소리에
으-아 애기 소스라쳐 깨고
등잔에 불을 다오
아버지는 당나귀에게
짚을 한키 담아주고
어머니는 애기에게
젖을 한 모금 먹이고
밤은 다시 고요히 잠드오
버선본
어머니
누나 쓰다 버린 습자지는
두었다가 뭣에 쓰나요?
그런 줄 몰랐더니
습자지에다 내 버선 놓고
가위로 오려
버선본 만드는 걸
어머니
내가 쓰다 버린 몽당연필은
두었다가 뭣에 쓰나요?
그런 줄 몰랐더니
천 위에다 버선본 놓고
침 발러 점을 찍곤
내 버선 만드는 걸
빨래
빨랫줄에 두 다리를 드리우고
흰 빨래들이 귓속이야기 하는 오후
쨍쨍한 칠월 햇발은 고요히도
아담한 빨래에만 달린다
산골물
괴로운 사람아 괴로운 사람아
옷자락 물결 속에서도
가슴속 깊이 돌돌 샘물이 흘러
이 밤을 더불어 말할 이 없도다
거리의 소음과 노래 부를 수 없도다
그신 듯이 냇가에 앉았으니
사랑과 일을 거리에 맡기고
가만히 가만히
바다로 가자
바다로 가자
산상
거리가 바둑판처럼 보이고
강물이 배암의 새끼처럼 기는
산 위에까지 왔다
아직쯤은 사람들이
바둑돌처럼 버려 있으리라
한나절의 태양이
함석지붕에만 비치고
굼뱅이 걸음을 하던 기차가
정차장에 섰다가 검은 내를 토하고
또 걸음발을 탄다
텐트 같은 하늘이 무너져
이 거리를 덮을까 궁금하면서
좀 더 높은 데로 올라가고 싶다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쉽게 씌여진 시
창밖은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노트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아침
획, 획, 획
소꼬리가 부드러운 채찍질로
어둠을 쫓아
캄, 캄, 어둠이 깊다깊다 밝으오
이제 이 동리의 아침이
풀살 오른 소엉덩이처럼 푸르오
이 동리 콩죽 먹은 사람들이
땀물을 뿌려 이 여름을 길렀소
잎, 잎, 풀잎마다 땀방울이 맺혔소
구김살 없는 이 아침을
심호흡 하오. 또 하오
오줌싸개 지도
빨래줄에 걸어논
요에다 그린 지도
지난 밤에 내 동생
오줌 싸 그린 지도
꿈에 가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 벌러 간 아빠 계신
만주땅 지돈가?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 집니다
도로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장
이른 아침 아낙네들은 시들은 생활을
바구니 하나 가득 담아 이고
업고 지고, 안고 들고
모여드오, 자꾸 장에 모여드오
가난한 생활을 골골이 벌여 놓고
밀려가고 밀려오고
저마다 생활을 외치오. 싸우오
왼하로 올망졸망 생활을
되질하고 저울질하고 자질하다가
날이 저물어 아낙네들이
쓴 생활과 바꾸어 또 이고 돌아가오
종달새
종달새는 이른 봄날
질디진 거리의 뒷골목이
싫더라
명랑한 봄 하늘
가벼운 나래를 펴서
요염한 봄노래가
좋더라
그러나
오늘도 구멍 뚫린 구두를 끌고
훌렁훌렁 뒷거리 길로
고기 새끼 같은 나는 헤매나니
나래와 노래가 없음인가
가슴이 답답하구나
참새
가을이 지난 마당은 하이얀 종이
참새들이 글씨를 공부하지요
째액째액 입으로 받아 읽으며
두 발로는 글씨를 연습하지요
하로 종일 글씨를 공부하여도
짹자 한 자 밖에는 못 쓰는 걸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 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땐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러운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 들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초 한 대
초 한 대-
내 방에 풍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의 생명인 심지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라 버린다
그리고도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풍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호주머니
넣을 것이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흰 그림자
황혼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하로종일 시들은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
땅검의 옮겨지는 발자취소리
발자취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든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든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 고장으로 돌려보내면
거리모퉁이 어둠 속으로
소리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든 흰 그림자들
내 모든 것을 돌려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황혼처럼 물드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하로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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