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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편)   북으로 간 사람들

고목의향기 2013. 11. 3. 14:57

           (2편)   북으로 간 사람들    

 

 이원조처럼 해방기에서 6·25전쟁에 이르는 시기에 월북한

문학인들은 대개 100명 안팎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개는 20년대 후반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서

활약하던 문인들이 그 주류를 이루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광복 후 우리 문단은 이 카프 세력이 먼저 주도권을 잡았다.

8월 임화·김남천·이태준 등의 조선문학가건설본부(문건)가

 결성된 데 이어 9월 이기영·한설야·한효·송영 등의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문동)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다시 남로당의 뜻에 부응해 조선문학가동맹(45년 12월)으로

통합돼 보다 분명한 정치색을 드러내게 된다.

 

조선문학가동맹이 문건파의 주도로 활동을 펼치게 되자

 문동파는 불만을 품고 45년 12월에서 이듬해 사이에 월북해 버리고 만다.

이때의 일을 제1차 월북이라 할 수 있다.

남쪽에 남은 문건파 문인들의 입지도 넓지 못했다.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1946.5), ‘철도 파업’(1946.9) 등을 주도한

이유로 수사의 표적이 된 남로당의 주축 세력이

 월북했기 때문이다. 문건파의 월북은 대체로 47년부터

남한 단독정부 수립(48년 8월) 때까지 일어나는데

이를 제2차 월북이라 할 수 있다.

 

 평양을 방문한 소설가 홍명희가 북한에 잔류한 것도 이 무렵 일이다.

광복 후 임화 등에 이끌려 좌익 문인단체에서 활동했거나 이름을 빌려준

 다수의 문인들은 공산당이 불법화되고

 좌익계열이 월북을 해버리자 조선문학가동맹을 해체하고

사상 전향을 한다.

 

이들은 대부분 좌익 혐의를 벗기 위해 정부가 조직한

 국민보도연맹(1949년 10월 결성)에 가입해 신분 안정을 보장받는다.

 6·25전쟁이 터지고 이승만 정부는 이틀 만에 대전으로 피란했다.

28일 아침 “동요하지 말라.

국군은 북진 중이고 유엔과 미군이 도와주러 온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반복되는 라디오방송 목소리는

대전에서 녹음한 특별 발표문이었다.

 

 게다가 그날 새벽에 정부는 한강 인도교와 세 개의

 철교를 폭파시킨 상태였다.

이 무렵부터 전국에 흩어진 거의 30만 명에 육박하는 보도연맹

 가입자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사상범으로

 복역 중인 죄수들과 함께 처형당하는 비극과 마주하게 된다.

 이른바 보도연맹사건이다.

 

 

이즈음 월북 문인들이 서울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월북 전 조선문학가동맹이 처음 자리했던 보신각 옆

 한청빌딩 4층에 다시 사무실을 열었다.

 

일제 때부터 명망 있던 인사들, 살아남은 보도연맹 가입 문인들,

피란 못한 문화예술인들은 이들의 요구대로 사상교육을 받고

 조선문학가동맹에 새로 가입해야 했다.

 반공(反共)에 적극적이었던 인사는 정치보위부로 넘겨졌다.

 소설가 이광수는 서울에서 6·25를 맞았다.

 

7월 12일 종로경찰서로 연행됐다 며칠 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9·28 수복 때 평양으로 압송된 그는 압록강 중류의

 도시 만포에서 혹한에 시달리며 병을 앓다가

그해 10월 25일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평론가 김기진은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인민재판을 받고

 폭행당해 초주검이 됐다가 살아났다.

정지용과 함께 30년대 한국 모더니즘 시의 선봉에 섰던

 시인 김기림은 서울사범대 교수로 회의를 마치고

을지로 입구 쪽으로 오던 길에 한 청년에 의해 지프로 끌려갔다.

 

수필가 김진섭, 소설가 이석훈, 시인 김억·김동환,

 평론가 박영희, 고려대 교수이자 시인 임학수 역시

 정치보위부에 끌려갔다. 이들은 모두 인민군 퇴각 때 북으로 끌려가다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 반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로 유명한 작가 박태원

등은 문학가동맹에 재가입해 월북의 수순을 밟았다.

이때의 일을 제3차 월북이라 할 수 있다.

 

월북문인들은 북한 문단에 편입돼 북한문학사

 형성에 한몫을 담당한다.

 그러나 다수는 김일성 체제 아래 숙청당해 횡사하거나

지방으로 하방(下放)돼 말년까지 구차한 생을 이어가야 했다.

초기 숙청 대상은 문동파의 견제를 받은

임화·이태준·이원조·김남천 등 문건파들이었다.

이들은 박헌영 등 남로당의 핵심들이 숙청당하는 과정에서

 무더기로 ‘미제 스파이’로 낙인찍히며 죽음의 길을 걸어야 했다.

 

이에 비해 이기영·한설야·송영 등 문동파의 핵심들은

 김일성 체제 문예운동의 실천세력으로 북한에 안착한 편이었다.

 이상 등과 함께 한국 모더니즘 소설의 기수였던

 박태원은 이태준과의 깊은 인연으로 월북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태준 등은 일찌감치 숙청당하지만

그는 북에서 최고 소설로 평가받은 대하소설

?갑오농민전쟁?을 발표하면서 권력을 누렸다.

 

 

 

  분단의 경계에서 질곡에 빠지다 (3편)

 

(을 자료준비하여 올려 드리갰읍니다.) 

                              

 

자료제공 (박덕규 단국대 교수·소설가 )

 

 

 

 

 
출처 : 진주엔카마을
글쓴이 : 푸른바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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