宮本武蔵-村田英雄 作詞 有吉 伸 作曲 古賀政男
台詞 死ぬは一定夜明けの霧に おぼろに浮ぶ下り松 行くぞ吉岡雄叫びあげて 今日は昨日の我の勝つ
一 誰に供養か 観音様を 刻む武蔵に 月が照る 草鞋踏みしめ 孤剣を抱いて 超える修業の 超える修業の 幾山河
二 風におののく 浜木綿の花 見つめるお通の 眼に涙 櫂を握って 厳流島に 立てば真昼の 立てば真昼の 雲が飛ぶ
三 寄せて返して 返して寄せる 海の潮鳴り雑魚の歌 水の深さよ武蔵の心 乗せて小舟は 乗せて小舟は消えて行く
徳川と幕府の成立 江戸時代 一 豊臣秀吉(とよとみひでよし1536~1598年)에 依해 約 100年間 繼續된 戰國時代는 끝이 났지만 秀吉의 死後 後繼者 자리를 둘러싸고 日本을 東西로 나누게 되는 큰 戰爭이 벌어 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이긴 德川家康(とくがわいえやす. 1542~1616年)가 江戶에 幕府를 열면서 1867年까지 265年間 持續된 江戶時代(徳川 時代)가 始作됩니다. 以後 明治時代에는 近代化가 始作되기 때문에 江戶時代는 마지막 武家 政權의 時代이며 또 現代 日本과 直接 連結되는 重要한 時代라 할 수 있습니다.
東西の対立 1592年과 1597年,2回에 걸쳐서 韓半島를 侵略한 豊臣秀吉의 政策은 日本人 들에게도 엄청난 被害를 주었지만 豊臣 政權의 內部에도 깊은 골을 만들었습니다. 豊臣 政權이 成立된 背景에는 軍事的으로 貢獻한 武將들과 行政 面으로 寄與한 有力者들이 있었는데, 韓半島에서 撤收한 後 두 集團의 對立은 한層 더 깊어졌습니다. 特히 秀吉의 命令으로 出戰해야 했던 武將들은 戰爭에 參加하지 않고 行政面, 特히 經濟政策을 擔當하고 있던 石田三成(いしだみつなり. 1560~1600年)를 쓰러뜨리기 爲해 德川家康를 中心으로 結束해 갔습니다.
그리고 1598年에 秀吉가 죽으면서 아들인 豊臣秀頼(とよとみひでより)를 後繼者로 삼으려는 三成와 家康의 對立은 極甚해져 갔습니다 두 集團은 全國의 有力 豪族들을 끌어들였고 日本의 政治 勢力은 結局 大阪를 中心으로 하는 豊臣 派와 東쪽을 據点으로 하는 徳川 派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天下分け目の戦い 1600年 陰曆 9月, 를 中心으로 하는 西軍과 를 盟主로 하는 東軍이 지금의 岐阜県(ぎふけん) 西南部의 関ヶ原(せきかはら)에서 激突했습니다 全國 各地에서 戰鬪가 벌어졌지만 関ヶ原 戰鬪에 參加한 軍勢는 西軍이 約 10萬 名, 東軍이 約 7萬 5千名으로 近代 以前의 戰爭에서는 1815年의 ‘워털루 戰鬪’와 함께 世界 2大 戰爭으로 꼽힐 만큼 大規模 戰鬪였습니다. 関ヶ原 戰鬪는 後의 日本의 政權이 決定되었다는 意味로 ‘天下分け目の戦い(천하판가름의 싸움)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関ヶ原는 岐阜県과 滋賀県(しがけん) 境界의 山池로 둘러싸인 작은 盆地(동서 約 4 km 南北 約 2 km)지만 交通의 要地이기 때문에,古代부터 이곳을 차지하는 것 이 戰鬪의 勝利를 意味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東海道新幹線(とうかいどうしんかんせん) , 東海道本線(とうかいどうほんせん) 高速道路와 國道가 지나는 交通의 要衝地인 것에는 變함이 없습니다.
戦場の名残を歩く 11月 初,東京駅에서 名古屋駅까지 東海道新幹線(1時間 45分) 名古屋駅에서 東海道本線으로 갈아타 関ヶ原로 向했습니다. 東海道本線은 1964年에 新幹線이 開通될 때까지 東京와 神戸 사이를 連結한 鐵道로 지금은 地方 路線이 되어 버렸지만, 鐵길 옆으로 펼쳐지는 마을 風景이나 田園 風景을 즐길 수 있어 좋습니다.
名古屋에서 50分 程度 걸려 関ヶ原駅에 到着한 다음 먼저 家康가 처음으로 構築한 陣地 터를 찾았습니다 國道를 따라 徒步 約 20分. 작은 언덕의 기슭에는 ‘德川家康 最初陣 터(德川家康最初陣跡)’라고 쓰인 標識가 있고 그 옆에는 德川 家門의 紋章이 그려진 깃발이 서있었습니다.
이 언덕 近處에 家康의 直屬軍隊 約3 萬名이 모였다고 합니다. 언덕 위에서 西北쪽으로 2 km 程度 앞에 西軍을 引率한 石田三成의 陣地 터도 보이는데. 아마도 그 사이의 平地를 中心으로 戰鬪가 벌어졌다고 생각이 드네요 有力 豪族이나 武將들의 陣地가 있었을 작은 山을 바라보면서 논밭 사이의 길을 걸어 三成의 本陣 터에 가보았습니다. 저녁 무렵의 옛 戰場에는 어딘지 모르게 哀愁가 감돌고 있었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