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서예 자료

[스크랩] 36. 청나라 때 일본 서단에서 가장 풍미했던 서예가

고목의향기 2012. 11. 1. 13:32

36. 청나라 때 일본 서단에서 가장 풍미했던 서예가


청나라 때 일본에서 가장 풍미했던 서예가는 왕탁(王鐸)이었다.

왕탁(王鐸, 1592-1652)의 자는 각사(覺斯)이고 호는 치암(痴庵)ㆍ숭초(嵩樵)ㆍ연담어수(烟潭漁)이다.  그는 하남성 맹진(孟津) 사람이라 왕맹진(王孟津)이라 불고 벼슬은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이르렀다.  『의산원첩(擬山園帖)』ㆍ『낭화관첩(琅華館帖)』『왕탁서법진(王鐸書法選)』등의 서예 작품들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왕탁의 행초서 필법은 뛰어나고 풍격은 독특하며 결체는 험준하고 굳세다.  필세는 온건하고 리듬이 명쾌하며 마르고 실함 서로 응하며 점과 획은 서로 뒤섞여있다.  특히 광초서는 날아올라 치솟는 듯 하여 정신의 변화를 예측하기 어려워 별도로 하나의 특색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먹색은 차례대로 변화가 풍부하고 농담이 서로 섞이며 무겁고 돈후하다.  혹은 오래된 나무와 마른 등나무 같고, 혹은 가을 산의 엷은 구름과 같으며, 기이하고 험절한 가운데 깊게 잠김이 있고, 험준하게 빼어난 가운데 무거움이 있다.  필묵이 온중한 가운에 풍요롭고 윤택함이 있으며, 리듬이 명쾌한 가운데 변화가 있어 그의 서예의 완미한 예술 특징을 구성하였다.

왕탁은 명나라 말과 청나라 초의 서단에서 장서도(張瑞圖)ㆍ황도주(黃道周)등과 높고 예스런 법을 취하고 옛사람을 배우자는 것을 제창함으로써 당시 성행했던 동기창 일파의 ‘평근수일(平謹秀逸)’한 서풍과 대항하여 면목이 새로운 시대서풍을 개창하였다.  그의 서예 성취는 동시대 사람을 훨씬 뛰어넘었을 뿐만 아니라 북송의 대가와 서로 아름다움을 견줄 수 있을 정도로 서예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점유하였다.  특히 현대 중국 서예와 일본 서단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출처 : 한국서학연구소
글쓴이 : 은초김향선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