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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5. 최초의 行草書 革新家

고목의향기 2012. 11. 1. 13:39

25. 최초의 行草書 革新家


최초의 행초서를 혁신한 서예가는 동진의 왕희지이다. 

왕희지(王羲之, 321년- 379년)의 자는 일소(逸少)이고, 낭야임기(瑯琊臨沂, 지금의 山東省에 속함) 사람이다.  그는 귀족 출신으로서 관직은 우군장군(右軍將軍)과 회계내사(會稽內史)에 이르렀기 때문에 사람들이 ‘왕우군(王右軍)’이라 불렀다.  그의 서예는 고상하고 예스러우면서 온후하며, 뛰어나고 묘함은 입신의 경지이다.  초예(草隸)․팔분(八分)․비백(飛白)․장행(章行) 등 여러 서체를 정미하게 갖춰 스스로 일가의 법을 이루고 천변만화한 것은 신의 공력을 얻어 고금의 으뜸이 되었다. 

왕희지는 어려서 위부인을 스승으로 삼아 공부하여 기량이 날로 향상하였다.  위부인은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왕희지의 서예는 늙어서 이루어지는 지혜가 있어 이후에 반드시 큰 이름을 누려 그녀의 명성을 가릴 것이라고 감탄하였다.  뒤에 왕희지는 양자강을 건너 북으로 명산을 유람하며 이사(李斯)․조희(曹喜)․종요(鍾繇)의 글씨를 감상하고 여러 비를 스승으로 삼아 처음 배웠던 것을 개변하며 널리 여러 장점을 모아 정밀하게 체세를 연구했다.  초서는 대부분 장지(張芝)에서 법을 취하고, 해서는 종요에서 득력하였다.  그는 이전 시대와 당시의 서예작품에서 용필들을 두루 보고 결자의 좋은 점을 그의 작품에 융합하고 통일시켜 행초서의 혁신에 주력하였다.  이에 필법을 골간으로 삼고, 기운을 영혼으로 삼아 낡은 것을 버리고 새것을 내어 ‘여러 법을 겸비하고 당겨 일가를 갖추어 이루었다[兼攝衆法, 備成一家].’  마침내 그는 한․위 이래의 질박한 서풍을 일변하여 연미하고 흐르듯 편한 새로운 서체를 창조하여 ‘귀함은 여러 서품을 초월하여 고금에 둘도 없는[貴越群品, 古今莫二]’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역대 평론가는 그의 초서를 농염하고 섬세함을 절충했고[濃纖折衷], 해서는 필세가 공교하고 형태는 긴밀하며[勢巧形密], 행서는 굳세고 아름다우며 강건하여[遒媚勁健], 천변만화를 나타내면서 체세는 자연스러워 서예의 변화발전에 옛것을 계승하여 앞을 열어주는 데에 큰 공헌을 하였다고 말했다.  일본과 동남아의 서단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평소 ‘서성(書聖)’이란 명예가 있다. 

왕희지의 묵적은 역대로 보물처럼 사랑을 받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며 당 태종 이세민은 왕희지의 작품에 대하여 매우 탄복하여 황궁에 왕희지의 진적 3600여 폭을 수장하였다.  천하제일의 행서인 <난정서>는 당 태종이 특별히 좋아하여 이를 구한 뒤에 결국 순장까지 하였으며, 왕희지의 법서 묵적은 시대가 멀기 때문에 이미 없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에 전해지는 것은 단지 당나라 모본인 <난정서(蘭亭敍)>․<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상란첩(喪亂帖)>․<악의론(樂毅論)> 등의 묵적이다.  그의 작품을 감상하면 마치 한 폭의 엄숙하고 조용한 산수화를 감상하는 것 같으며, 마치 문을 닫고 얽힌 솜을 누르고 올리는 악곡을 듣는 것 같으며, 조용하면서 그윽하고 아름다운 시 한 수를 읊는 것 같은 아름다운 예술적 향수를 느끼게 한다.

출처 : 한국서학연구소
글쓴이 : nanikim2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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