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篆이라 함은, 秦始皇이 중국을 통일하기 이전에 7국 (진,초,연,제,한,위,조)에서 각자 사용했던 조금씩 다른 글자 전체를 말한다. 현재 남아있는 것으로는 石鼓文이 유일하며 현존하는 最古의 石刻文字이다.
석고문에 대해 설명하자면 옛날에는 둥근 것을 갈(碣)이라 하고, 네모난 것을 비(碑)라 하였는데, 석고는 원형이었고 새겨놓은 내용이 대부분 전국시대 진(秦)나라의 임금이 사냥하는 일이었으므로 엽갈(獵碣 )이라고도 한다.
석고문은 10개의 북(鼓)모양의 돌에다 주문을 새겼다. 석고의 높이가 90cm, 직경이 60cm정도이며, 머리 부분이 밑부분보다 가늘고, 원문이 약 700자 정도 실려 있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글자는 겨우 300여자이며, 그나마도 적지 않은 글자들이 깨지고 훼손되어 판독하는 자는 270자 내외에 지나지 않는다. 현존하는 송탁본(宋拓本)에는 465자가 실려있다.
석고문의 연대에 관해서는 주선왕(周宣王)때의 것이라는 설(說)이 많았으나, 사실 진양공(秦襄公) 8년 때의 것이라는 설이 이미 정론으로 되어 있다 (곽말약의 석고문연구 )
서체는 소전(小篆)으로 변하기 이전의 문자로 대전의 체계에 속하며 대전의 유일한 법칙이기도하다. 그 결체(結體)는 서로 대립되는 법칙이 있고 필획은 굳세고 엄정하며 결구는 빽빽하고 기이하며 웅장하다.
당(唐)의 장회관(張懷瓘)은 서단(書斷)에서 "體象卓然 殊今異古 落落珠玉 飄飄纓珞 倉힐(吉+頁)之嗣 小篆之祖 以名稱書 遺迹石鼓"
"글자의 형상이 고금과 달리 매우 뛰어나니 옥구슬이 주렁주렁 달린 듯, 영락이 하늘하늘 날리는 듯하다. 창힐의 뒤를 이었고 소전의 조종이 되었다. 북 모양의 돌에 글자를 새겼으므로 석고(石鼓)라는 명칭으로써 그 글자를 일컫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석고문은 甲骨, 金文을 계승하고 ,이사(李斯) 소전의 조종(祖宗)이라고 할 수 있으며, 당대(唐代) 구양순(歐陽詢), 우세남(虞世南), 저수량(楮遂良)은 물론, 송대(宋代) 이후의 역대 서법가들이 모두 이를 추숭(推崇)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아울러 전서의 모범으로 삼았다.
조초문(組楚文) 조초문은 석고문보다 조금 후인 진(秦)의 혜문왕(惠文王) 12년 (기원전 313)의 것으로 당시 초(楚)의 회왕(懷王)과 패권을 다투고 있던 혜문왕이 수신(水神)에게 회왕을 저주한 고문(告文)을 각입한 석각이다. 모두 3개이며 무함문(巫咸文) 326자, 궐추문(厥湫文) 318자, 아타문(亞駝文) 325자이다. 북송(北宋)시대에 발견되었으나 지금은 원석(原石)이 없고, 다만 그 당시에 만들어진 강첩(絳帖)이나 여첩(汝帖)이란 법첩 중에 그 문자가 모각(摸刻)되어 있어 대체적인 것을 알 수 있다. 자체(字體)은 석고문을 닮았으나 전국말기(戰國末期)에 이르러 문자가 간소화되어 가는 영향으로 석고문보다는 간략해져 있다.
상앙량(商앙量) 秦의 효공(孝公)시대에 등용된 衛의사람 상앙의 革命的 改革을 "상앙의 變法"이라 하였는데, 진나라가 통일을 이루는데 기초를 다졌다. 법가(法家)의 정책(政策)에 따라 法嶺을 통일하고 도량형(度量衡)을 제정하다고 傳하는데, 당연히 혼란한 문자(文字)의 통일 사업에도 착수하였다고 본다.
이때의 상앙의 제기(制器)가 상앙량(商앙量)으로서 그 양목척도(量目尺度)는 秦의 통일시의 도량(度量)과 완전히 合致된다고 한다. 小篆의 원형(原型)이 이 기물(器物)에서 찾아지는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다. 요는 始皇의 전국통일(全國統一)後에 행한 제시책(諸施策)은 상앙의 변법을 광대실시(廣大實施)한 것으로서 文字도 그 예외(例外)는 아닐 것이다.
그 외에 大篆으로는 新처虎符, 陽陵虎符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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