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시와 시조등

오감도의 해석

고목의향기 2010. 9. 14. 15:41
질문이 재미 있어서 저도 여기 저기 뒤져봤는데요...
다음글이 그럴 듯하군요
http://www.damoija.co.kr/sad2sang/poemcri/leesang-1.htm
에서 갖고 왔습니다.

▶오감도의 의미 :
오감도가 갖는 기술용어가 시적인 상징성을 띠며 동시에 암울하고 불길한 까마귀가 이미 부정적인 생의 조감을 예시하는 시적 분위기
새에 비해 까마귀라는 단어는 조감도라는 일상적 의미를 초월하여 불길함, 공포의 이미지
오르가즘도의 한문식 음역(오감도는 성교시 사정에 의한 정자의 분출이다-마광수)
조감도라는 것은 시점위치가 높은 투시도로써 즉 새가 위에서 내려다 보는 것을 말하는 회화기법, 도시법의 일종이다. 이것을 오감도라고 함으로써 조감도의 의미를 유지시킨채 까마귀가 가지는 불길함, 암울함을 대입시켜, 시와 연결하여 전체적으로 암울함, 불길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조감도라는 일상적인 단어에서의 탈출, 파괴라는 이상 특유의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13이 지니는 의미
최후의 만찬에 참석한 기독이하 13인(임종국) 위기에 당면한 인류(한태석) 무수한 사람(양희석)
당시의 13도(서정주) 불길한 공포(이영일) 아해의 의미와 결합되어 불안을 표상(이승훈) 이상 자신의 기호(고은)
1은 남성의 성기, 3은 여성의 유방 또는 엉덩이, 13은 13세로 아이들의 성적특징이 완연히 드러나는 나이 상징(마광수)
여기서 13은 상당한 상징성을 갖는다. 따라서 다양한 해석이 도출되는데, 여기서는 13을 12의 고정된 이미지에서의 탈출로 본다. 즉 12라는 완결된 숫자(시간 12시간, 12개월 등)에서의 일탈을 의미한다. 이상의 다른시 [1931년]이라는 시에서 '나의 방의 시계 별안간 13시를 치다....'라는 것에서 볼 수 있는데 13시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다. 즉 이것은 현실과 생활을 초월하고, 그러한 매임으로부터 탈출하게 된다. 모든 상식과 관념, 규범 등을 초월한 일탈된 삶의 선택인 것이다.

▶아해의 의미
이것은 아이라는 일상적 단어로부터의 탈출을 의미. 그렇게 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낯설게 만들려는 의도로 보인다.

▶도로로 질주하오
태초부터 미래를 향해 질주하는 인간의 현실적 상황과 도로라는 역사적 도정을 표시하는 은유(이어령)
불안의 극단적 형태 혹은 성적 흥분(이규동) 현대의 위기의식(정귀영)
막다른 골목으로의 질주는 이미 절망이 암시된 길로 미숙했던 정신이 높은 이상적 정신을 쭉쭉 뻗어가며 성숙하지만 이는 이미 절망이 암시된 것이다.

▶무서움
무섭다는 것은 불안이다. 무섭게하는 대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는 현실적 삶에 대한 불안이다. 신에 대한 의식이 강햐지며 자의식이 강화되고 그러한 강한 자의식은 현실적 삶에서는 절망을 가져다 줄뿐이다. 실존에 대한 불안인 것이다.

'13인의아해가도로를질주하오'로 시작되는 시는 독자에게 궁금증을 유발시킨다. 도대체 아이들이 그것도 13명이 떼지어 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도 막다른 골목을 달린다는 것은 독자에게 상당한 궁금증을 유발시킨다. 이것은 독자들로 하여금 궁금증 가득히 지켜보게 만든다. 한데 궁금증으로 조금은 신경이 곤두선 독자에게 정말 지루하고 답답한 일이 벌어진다. 같은 말이 무려 10번이나 반복되는 것이다. 2-3번이라면 그러한 궁금증이 증폭되는 효과가 있을지는 몰라도 10번은 독자에게 지루함을 제공하게 된다. 결국 이 둘째 토막은 공포감과 지리함이 뒤섞인 거의 아이러니에 가까운 경지를 지니고 있는 셈이 된다.


셋째연에 들어서도 변함은 없다. 둘째 토막이 끝나고 모처럼 잠시 숨을 돌린 뒤에 곧이어 또 반복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무서움에 대한 정체는 말이 없다. '다른 사정은 없는 것이 차라리 나았소'라고 하면서 무서움과 무서워함만이 있으면 그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공포는 까닭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이렇게 있듯이 공포도 워낙 그렇게 있는 것이다. 중간에 잠깐 숨을 돌린 열 세 번의 반복 속에 나타나는 무서움이 독자의 무서움을 부채질하는 것은 사실이다. 정확하게는 무서움에 대한 궁금ㅁ증을 부추기는 것이다. 지루함 속에서 공포가 눈덩이처럼 불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루함은 대다한 지연의 효과를 나타낸다. 종시 있어야 할 그 무엇, 끝내 마무리가 지어져야 할 무엇인가가 이 반복에 의해 한껏 뒤로 미루어지는 것이다.


다음 '13인의 아해는....모였소'에서 우리는 역과 역의 어울림을 볼 수 있다. 즉 무서운 아이가 곧 무서워하는 아이인 것이다. 이같은 역과 역의 어울림은 다음 넷째 토막에서 다시한번 더 나타난다.
이 경우 '1.2/2.1'과 같은 대조로 무서운과 무서워하는 것과 같은 대조가 갖는 효과가 증대되고 있다. 이렇듯 앞에 이미 내세워진 라이트모티브를 뒤집어 반복하는 수법, 이 수법은 이상이 자주 구사하는 수법이다.


한데 이 역상의 기법이 종국적으로 이 작품에다 어떤 의미있는 해석이 가해질 실마리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마지막 토막에서 결정적으로 나타난다.

이렇듯 첫째 토막과 마지막 토막을 연결하면 바로 역상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일은 이 두 토막이 앞뒤를 꼭 동여매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샌드위치형의 시라고 할 수 있는데, 나머지 시행들은 알맹이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알맹이가 아니라, 바로 껍데기에 있다.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형식이기 때문이다.


질주/질주 아니함은 유/무와 전환과도 같다. 아이들은 질주하지 않고 결국 골목에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사태는 심히 싱겁게 끝난 셈이다.


이 시에는 몇 개의 역상이 존재하는데 첫째 토막과 마지막 토막과의 대응, 무서운과 무서워하는, 1.2/2.1의 역상이 있다. 요컨대 이 시는 몇번에 걸친 작은 규모의 엎치락 거림을 겪다가 드디어 처음 토막과 마지막 토막에 걸친 커다란 몸부림의 엎치락거림을 연출한 것이다. 이같은 작은 중첩 내지 역전을 거느린 커다란 역전, 이 중복된 역전이 곧 이 시작품이 지닌 형식상의 특색이자 논리임이 여기서 명백해진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시해석을 시도한다.


막다른 골목에 아이들이 뛴다고 사람을 불러놓고, 결국엔 아무도 없다고 하는 것, 이것은 참으로 허망한 장난이다. 빈주먹을 쥐고 손안에 무엇이 있는지 맞춰보라는 장난인 셈이다. 앞서 살핀 처음과 마지막의 트릭에서 우리는 비슷한 꼴을 당한다. 아주 지리한 반복으로 호기심이며 공포가 잔뜩 불어난 뒤에 당하는 것이다. 처음에서 곧바로 끝으로 넘어가면 이러한 장난은 성립되지 않는다. 한동안의 실랑이가 필요한 것이다. 둘째, 셋째, 넷째 토막의 작은 역전극을 치루면서 최종적인 역전이 한껏 빛을 발하는 것이다.


역전극의 트릭에 말려들어서 한번 당하고 난 뒤 그 트릭의 재미를 눈치채는 일, 즉 바로 이 시가 체험으로서 우리에게 던져주는 것이고, 그 체험이 끝났을 때 이 시는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말썽 많은 13이란 수의 상징도 이 커다란 트릭의 테두리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즉 이것은 이상이 거대한 트릭안에 놓아둔 작은 부비트랩인 셈이다. 13은 13이라고 해도, 13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13자체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한채 해석을 시도한다는 것은 바로 이상이 파놓은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결국 이 작품은 책략의 시였던 것이다. 시를 쓴 동기가 바로 책략적이고 시의 구조 또한 책략적이다. 이 시를 쓸 때 이상은 바로 트릭스터(Trictster)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트릭을 사기꾼 같은 악랄한 계략이라고 생각할 것까지는 없다. 이것은 이상 특유의 희극적 아이러니-시를 무대로 삼아 한편의 희극을 연출해 내는 기법으로서 문제될 트릭이면 우리의 얘기로서 족한 편이다. 그 희극에서 시적 자아는 연출자가 되는 것이고, 독자는 배우가 된다. 그의 시에서 독자는 읽는 일만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시가 만들어 놓은 책략을 실천하게 되고, 우리는 그 트릭에 걸려는 역설적인 즐거움을 만끽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책략은 그의 장난기 바로 그것이고, 그의 장난기는 그가 당대 사회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회의이며 냉소, 그것에서 비롯한다. 동시에 그 회의며 공포는 매우 주지주의적인 색조를 띠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은 날개에서 자아를 철저하게 희화화하였다. 그 작품에서 나는 바보스런, 그러면서도 매우 분석적인 인물이다. 그럴수록 희극성이 드높여진다. 정확하게는 희극적 아이러니가 드높여진다. 그러나 오감도 시제 1호에서는 독자를 희화화하고 그 독자들에게 딸린 세계며 이념들을 희화화하였다. 독자와 그 세계의 회화화를 위한 책략이며 암수로서 이상은 오감도 시 제 1호를 세상에 던진 것이다. 한토막의 냉소이듯이.

 옮긴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