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시와 시조등

백수 정완영.시조모음

고목의향기 2010. 9. 16. 15:16

     
        
      

從夫靑山/정완영


꽃피는 봄 한철도 속절없이 사라지고
불타는 가을철도 이내 지고 말았는데
아 울고 떠나간 종소리 산이 혼자 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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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세상 이야기1

우리가 서로 손놓고 헤어지는 그날 밤은
궁금한 일 있더라도 돌아보지 말일이다
자꾸만 뒤돌아보니 달도 따라 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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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세상 이야기2

귀뚜리 울음소리도 창가에만 그냥 두면
하늘에 올라가서 서로 별이 되는 건데
사람이 데리고 다니니 자꾸 울게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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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이 나를 따라와서  /  정완영




桐華寺 갔다오는 길에 山이 나를 따라와서

도랑물만한 피로를 이끌고 들어 선 茶집

따근히 끓여준 茶가 丹楓만큼 곱고 맑다.


산이 좋아 눈을 감은 부처님 그 無量感

머리에 서리를 헤며 귀로 외는 楓岳 소리여

어스름 앉는 黃昏도 허전한 정 좋와라.


친구여, 우리 손 들어 作別하는 이 하루도

天地가 짓는 일들의 풀잎만한 몸짓 아닌가

다음 날 雪晴의 銀嶺을 다시 뵈려 또 옴세나.

한세상 이야기5

텅 비워둔 고향하늘 울고 가는 저 기러기
제 새끼 밥 지어주려고 물길으러 간다는데
내 밥은 안 지어주고 울 어머니 어디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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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 우는 날에

옛날 우리 어머니가 지성스레 약을 다리듯
뻐꾸기 울음소리가 진초록을 다리는 날
고향산 늘어진 하루 해 새까맣게 다 탑니다

강산에 묻고 온 세월, 세월 속에 묻은 사람
한사코 매달린 시름까지 묻었는데
가슴에 잦아든 생각은 묻을 땅이 없습니다

살만큼 살았는데 지칠 만큼 지쳤는데
오고갈 말 한마디 남기고 갈 눈물 한 점
어디다 뿌려야 합니까 묻어둬야 한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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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에게

아무도 없는 고향 텅 비워둔 내 고향집
너랑 같이 내려가서 나랑 같이 살자하고
눈감은 멧새와 같은 풍경 한 좌를 사 들었다

너는 구원의 장수 밤하늘에 먹을 갈고
너는 영혼의 별빛 먼 성좌에 불붙이고
숙조여 꿈 깊은 밤이면 네 가슴에 잠들거라고향 생각

.
고향생각


쓰르라미 매운 울음이 다 흘러간 극락산(極樂山) 위
내 고향 하늘빛은 열무김치 서러운 맛
지금도 등 뒤에 걸려 사윌 줄을 모르네.

동구밖 키 큰 장승 십리벌을 다스리고
푸수풀 깊은 골에 시절 잊은 물레방아
추풍령 드리운 낙조에 한 폭 그림이던 곳.

소년은 풀빛을 끌고 세월 속을 갔건만은
버들피리 언덕 위에 두고 온 마음 하나
올해도 차마 못 잊어 봄을 울고 갔더란다.

오솔길 갑사댕기 서러워도 달은 뜨네
꽃가마 울고 넘은 서낭당 제 철이면
생각다 생각다 못해 물이 들던 도라지꽃.

가난도 길이 들면 양처럼 어질더라
어머님 곱게 나순 물레줄에 피가 감겨
청산 속 감감히 묻혀 등불처럼 가신 사랑.

뿌리고 거두어도 가시잖은 억만 시름
고래등같은 집도 다락같은 소도 없이
아버님 탄식을 위해 먼 들녘은 비었더라.

빙그르 돌고 보면 인생은 회전목마
한 목청 뻐꾸기에 고개 돌린 외 사슴아
내 죽어 내 묻힐 땅이 구름 밖에 저문다.

 

 

코스모스 씨앗 물고

뜰 앞 코스모스도
다 웃고 난 다음 날은

저렇게 자잘하게
씨앗들을 물었는데

생각외
한끝도 못 잡고
내 가을은 또 저무네


늦잠자리 있는 풍경

아득히 푸른 하늘을
나래 위에 불사르고

늦잠자리 한 마리가
꽃대 물고 졸고 있다.

가을은
막막한 바다
저 꽃대는 외로운 섬.

 

가을 꽃을 심습니다

과꽃

가을 꽃을 심습니다.
과꽃을 심습니다.

닦아 논 손거울같은
당목(唐木) 적삼 누이같은

딩그렁!
바람에 흔들릴
풍경 소리를 심습니다.



코스모스

가을 꽃을 심습니다.
코스모스를 심습니다.

써서 띄운 편지 아니라
쓰다 지친 분홍 편지

휘휘휘
바람만 맴돌다
지워질 사연을 심습니다.



동초(冬蕉)

분에 심은 겨울 파초를
방에 옮겨 두었더니

섣달 심설(深雪) 속에
잎이 반은 돋아났다.

차라리
잠들지 못한
푸른 꿈이 외로워.

 

 

          목련꽃 봐

석 삼동 굳게 닫힌 대문 밀고 들어서서
목마른 길 나그네 물 한 그릇 받아들듯
저것 봐 목 축이는 법 일러주는 목련꽃 봐.

안 죽고 살았더니 좋은 봄이 다시 와서
뽀얗게 먼지 낀 창 입김 불어 닦아내듯
저것 봐 하늘빛 환하게 닦아내는 목련꽃 봐

 

? 白水 정완영 시조의 작품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 애인 사랑
손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삼간 달이 뜨고
흐느껴 목 메이면 꽃잎도 떨리는데
푸른 물 흐르는 정에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통곡도 다 못하여 하늘은 멍들어도
피맺힌 열두 줄은 굽이굽이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 없이 鶴처럼 여위느냐.
-----------------------------------------<祖國>전문

 

다음은 작품집 <墨鷺圖> (1972)에 실린 작품이다.

매양 오던 그 산이요 매양 보던 그 절인데도
철따라 따로 보임은 한갓 마음의 탓이랄까
오늘은 외줄기 길을 낙엽마저 묻었고나.

뻐꾸기 너무 울어 싸 절터가 무겁더니
꽃이며 잎이며 다 지고 산 날이 적막해 좋아라
허전한 먹물 장삼을 입고 숲을 거닐자.

오가는 윤회의 길에 승속이 무에 다르랴만
沙門은 대답이 없고 행자는 말 잃었는데
높은 산 외론 마루에 기거하는 흰구름.

인경을 울지 않아도 山岳만한 둘레이고
은혜는 뵙지 않아도 달만큼은 둥그느니
문듯 온 산새 한 마리 깃 떨구고 가노메라.
-----------------------------------------<直指寺 韻>전문


다음은 작품집인 동시조집<꽃가지를 흔들듯이> (1978)를 보자.

지지 배배 지지 배배
봄 하늘을 불러 내린다
지지 배배 지지 배배
보리 목을 뽑아 올린다
밭머리 복숭아꽃도
귀가 멍멍 먹는다.
---------------------------<종다리가 울어 싸면>전문

 


다음은 작품집 <蓮과 바람> (1984) 속의 작품을 보자.

세월도 낙동강 따라 칠백리 길 흘러와서
마지막 바다 가까운 하구에선 지쳤던가
을숙도 갈대밭 베고 질펀하게 누워있네.

그래서 목로주점엔 대낮에도 등을 달고
흔들리는 흰 술 한 잔을 落日앞에 받아 놓면
갈매기 울음소리가 술잔에 와 떨어지데.

백발이 갈대처럼 서걱이는 老沙工도
강물만 강이 아니라 하루해도 강이라며
金海벌 막막히 저무는 또 하나의 강을 보네.
-----------------------------------------<乙淑島>전문

다음은 작품집 <蘭보다 푸른 돌> (1990) 속에 실린 작품을 보자.

옛날엔 칼보다 더 푸른 난을 내가 심었더니
이제는 깨워도 잠 깊은 너 돌이나 만져 본다
천지간 어여쁜 물소리 새소리를 만져본다.
--------------------------------<난보다 푸른 돌>전문

다음은 작품집 <오동잎 그늘에 서서> (1994)에 실린 작품 중 가장 마지막 작품을 언급해 보기로 한다.

옛날 우리 어머님은 빨랫줄에 빨래를 널어야
비로소 하늘 문이 열린다고 하시었다
아득히 너무 푸르러 막막해진 하늘 문이.

왜인지 나는 몰랐다 어린제는 몰랐었다
한 타래 다 풀어 넣어도 닿지 않던 그 唐絲실
어머님 그 깊은 가슴 속 하늘빛을 몰랐었다.
------------------------------------<어머님의 하늘>전문

다음은 동시조집<엄마 목소리> (1998)에 실린 작품을 보자.

보리밭 건너오는 봄바람이 더 환하냐
징검다리 건너오는 시냇물이 더 환하냐
아니다 엄마 목소리 목소리가 더 환하다.

혼자 핀 살구나무 꽃그늘이 더 환하냐
눈 감고도 찾아드는 골목길이 더 환하냐
아니다 엄마 목소리 그 목소리 더 환하다.
------------------------------------<엄마 목소리> 전문

다음은 작품집<이승의 등불> (2001)의 작품을 보자.

남현동은 관악산 밑 둥지만한 작은 마을
나는 멧새 다리 종종걸음 이십 년을
내도록 좁쌀만한 시 줍고 살아왔답니다.
-------------------------------<南峴洞 詩> 전문


당신이 있을 때는 빈 항아리 같던 사람
가고나니 삼월 하늘 祭器처럼 적막하다
봄은 왜 오지도 않고, 겨울 가지도 않네.
--------------------------------<적막 하늘>전문

다음은 제13시조집<내 손녀 然奵에게> (2005)의 작품을 보자.

내 손녀 然奵이가 느닷없이 나를 보고
산 좋고 물 좋은 마을에 할아버지 가서 살란다
그래야 휴가철이면 찾아 갈 집 저도 있단다.

그렇구나, 그리운 네 꿈도 산 너머에 살고 있구나
들 찔레 새순 오르듯 하얀 구름 오르는 날
뻐꾸기 우는 마을에 나도 가서 살고 싶단다.
--------------------------------<내 손녀 然奵에게>전문

?
다음은 백수 정완영의 시조집 自序나 수상집 속에서 보여 지는 번득이는 명문장들을 잡아 내 보았다. 그리고 서간문 집, 등 여러 곳에서 산문으로 남겨진 작품들의 면모도 한 번쯤 볼 생각이다.

옛적부터 어느 마을에서나 우물가에 향나무 한 그루쯤은 심어둘 줄 알았었다. 왜 그랬을까? 감나무, 배나무, 호두나무, 앵두나무, 자두나무, 하고많은 과일나무들이 많은데 왜 하필이면 향나무를 심었을까? 거기에는 우리 조상님들의 후손을 위한 깊고 먼 배려(配慮)가 숨어있으니 우물가에 향나무를 심어두면 향나무 뿌리가 우물바닥으로 스며들어 우물물이 소독이 되고, 그 물에 향내도 보태주기 때문이었다.---(<다홍치마에 씨 받아라> 自序에서>

나의 노래는 나의 뿔 나의 冠이었다. 이 뿔에 감기는 하늘빛은 몹시도 애달팠다. 앞으로 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거추장스럽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이 뿔을 고이고이 간직해 두었다가 내 사랑하는 祖國, 내 사랑하는 兄弟 앞에 벗어놓고 가야겠다. 그것만이 주어진 목숨에의 갚음의 길이라 느껴지기 때문이다.---(<採春譜>(1969) 自序에서)

祖國, 그것은 내 久遠의 사랑이었기에 이 가슴의 병이었고 因緣, 이도 내 받고 온 오랏줄이라서 핏줄처럼 당기어 아파오는 것일까? 流水는 울면서 흘러가도 청산에 푸르름을 더하고 搭은 含黙에 서도머리 위 구름을 맑히느니 타고 난 情과 恨이 몇 萬石이 길래 한 生을 거의 다 기울였는데도 解之를 못하는가?---(<墨鷺圖>(1972) 自序에서)

나 이제 서울에 왔다. 가향의 선비 遊京하는 것이 아니라 時流와 世波에 밀려 서울의 착잡(錯雜)에 표류(漂流)해 왔다. 육백 오십만의 망양(茫洋)에 떠서 시시로 沙工을 잃고 빈 배만 남아 自失할 때가 있음은 진실로 나의 孤舟가 方向을 을 모르는 까닭일까? 아니면 水天이 하도 멀고 아득하기 때문일까?---(<失日의 銘>(1974) 自序에서)

가을나무가 제 가지에서 제 잎을 털어낸 연후에 비로소 제 하늘을 확보하고 섰듯이, 나도 무거웠던 想念의 나날들을 다 털어낸 다음 날 내 하늘을 얻어 이고 싶어서이다.---(<꽃가지를 흔들듯이>(1978) 自序에서)

내가 무슨 古山子일까마는 그래도 이 까치집만한 일을 해내는데 宮闕만한 힘을 기울였었다. 진달래 피는 漢拏의 남에서부터, 눈서리 치는 雪岳의 북에 이르기까지, 작품의 素材(寫眞)를 찾아 진실로 2년이란 짧지 않은 세월을 허물어지려는 몸과 마음을 채찍질하며 步步의 길을 재촉했던 것이다.---(<白水詩選>(1979) 自序에서)

나이가 칠십이면 이웃 나라를 犯境해도 벌주지 않는다는 중국의 故事가 있다. 그만 나이가 되면 이 저승 나들이를 맘 놓고 해도 아무 탈이 없다는 뜻이리라.---(<蘭보다 푸른 돌>(1990) 自序에서)

사람 사는 세상을 멀찌감치 물러서서 서로 呼兄呼弟하며 부르고 대답하는 저 北岳과 道峰과 이 冠岳山, 이 산들이 저렇게 의연하고 푸르럴 수 있는 까닭은 아마도 하늘 아래 심고 섰는 억천 년의 긴 침묵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時調는 말로만 쓰는 시가 아니라 말과 말의 行間에 침묵을 더 많이 심어두는 시,---(<오동잎 그늘에 서서>(1994) 自序에서)

나무는 반드시 꽃을 피우고(木之必花), 꽃은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花之必實)고 했다. 내 세월의 가을이 깊을 대로 깊었는데도 하늘 아래 따 내릴 열매 없는 나인지라 낙엽이나 긁어모아 불사르거나.---(<茶 한 잔의 갈증>(1992) 自序에서)

수많은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가당찮은 신산(辛酸)도 밟아 넘어왔거니와, 분에 넘치는 정의(情誼)도 힘입어 왔다. 돌이켜 보면 미운 정 고운 정이 온 몸에 반점처럼 돋아나 있는 나는 속절없는 한 마리 얼룩 배기 사슴이다.---(<기러기 葉信>(2004) 自序에서)